리스본스토리센터와 나타의 기억
리스본의 아침 공기는 부드럽고 차분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 8시에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버스를 타고 안개 낀 강변을 따라 벨렝 지구로 향했다. 목적지는 제로니무스 수도원 가기 전 들릴 ‘파스텔 드 벨렝(Pastéis de Belém)’. 이곳은 단순한 베이커리가 아니다. 포르투갈 디저트의 상징, ‘나타(Pastel de Nata)’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바로 그곳이다.
나타는 18세기 초, 바로 옆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수도사들에 의해 탄생했다. 그 시절, 달걀흰자는 수도복의 풀을 만드는 데 쓰였고, 남은 노른자를 활용해 디저트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나타의 기원이다. 설탕과 노른자, 크림이 어우러져 바삭한 페이스트리 속에 담긴 이 작은 타르트는 수도원 재정이 악화되자 인근 제과점에 그 비법이 넘겨졌고, 1837년부터는 지금의 ‘파스텔 드 벨렝’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팔리기 시작했다.
이 작은 타르트를 제대로 맛보려면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야 한다. 관광객이 몰리기 전, 오픈 시간인 오전 8시에 맞춰 도착하는 것이 포인트다. 그날 우리도 그렇게 움직였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헤치고 도착한 베이커리 앞에는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내부는 고풍스러운 청과 흰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고, 수많은 제과사가 유리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막 구워져 나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나타는 입에 넣자마자 바삭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겉은 기분 좋게 캐러멜화된 바삭함, 속은 따스하고 부드러운 커스터드. 입안에서 퍼지는 풍미는 단순한 디저트를 넘어 하나의 역사로 다가왔다. 겉에 뿌린 시나몬과 슈거 파우더는 선택이지만, 나는 생크림의 농밀함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시나몬과 슈거 파우더를 더해 즐겼다. 그 순간의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포르투갈을 넘어 세계 각지로 뻗어 나간 나타는 몇 해 전, 마카오와 홍콩 여행에서 ‘에그타르트’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달콤한 얼굴을 맞이하였다. 포르투갈의 오랜 지배를 받았던 마카오에서는 나타의 정통성이 고스란히 이어진 듯했다. 타이파 지역의 로드 스토우(Lord Stow's Bakery) 에그타르트는 겉은 아주 바삭했고, 속은 단맛이 도드라졌었다. 반면 홍콩의 타이청 베이커리(Tai Cheong Bakery) 에그타르트는 영국식 커스터드 타르트와 포르투갈식 나타의 특징을 절묘하게 융합한 듯한 맛이었다. 마카오의 에그타르트보다 단맛이 덜하고, 쫀득하면서도 부드러운 커스터드가 유독 인상 깊었다. 고소하면서도 다소 묵직한 밀도의 페이스트리는 현지인들처럼 따뜻한 밀크티와 함께했을 때 비로소 그 완벽한 조화를 드러냈다. 이처럼 각 도시의 독특한 분위기와 어우러진 나타의 변주는 나의 미식 경험을 한층 더 풍요롭게 확장시켜 주었다.
하지만 이 모든 다채로운 경험 속에서도, 리스본 벨렝에서 아침 햇살을 맞으며 맛본 원조 나타의 기억은 단연 특별했다. 그것은 단순히 맛있는 디저트라는 차원을 넘어선 경험이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담장을 끼고 걷던 정적인 거리, 아직 완벽히 깨어나지 않은 도시의 고요한 공기, 따뜻한 커피와 함께했던 한입의 순간. 이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어우러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의 풍경으로 완성되었다. 나타는 작지만 깊은 맛의 세계를 품고 있으며, 전 세계 미식가들의 아침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진정한 유산임에 틀림없다.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이었지만 식사를 여유있게 마친 우리는 아우구스타 거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숙소인 '마이 스토리 호텔 아우로'에서부터 코메르시우 광장까지는 대략 10분 남짓. 10시가 채 되지 않은 거리는 아직 관광객의 발길이 분주하지는 않았고, 가게 셔터는 반쯤 열린 채로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칼사다의 하얀 돌길을 밟으며 걷는 동안, 전날의 여운과 오늘의 기대가 조용히 마음속에서 얽혔다.
광장에 도착했을 때, 리스본의 푸른 하늘 아래 테주강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아우구스타 개선문의 우아한 곡선이 시야를 환하게 열어주었고, 그 아래로 광장 한가운데는 여전히 한산했다. 코메르시우 광장의 동편, 대리석 기둥이 길게 드리운 회랑 아래에는 ‘리스보아 스토리 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름처럼 이곳은 도시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공간이다. 단순한 전시관이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서사 장치에 가깝다.
2,200제곱미터에 이르는 전시 공간은 여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 방문객을 시간의 강 위로 안내한다. 광장 너머에 자리한 리스본 스토리 센터(Lisboa Story Centre)는 이제 막 문을 열 참이었다. 여행자들로 붐비기 전, 가장 조용하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 이곳을 만나고 싶었다.
리스보아 카드 덕분에 입장 절차도 간편했다. 카드를 보여주니 티켓을 주었고 바로 앞에 있는 입구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집어 들었다. 매표소 앞에서 기다리던 한두 사람을 지나, 곧장 전시 공간으로 들어섰다. 마치 무대가 막 오르기 직전, 객석에 앉은 첫 관객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전시실은 고요했고, 그 덕분에 리스본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입구를 지나면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리스본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동반자이자 해설자이다. 안내를 따라 전시실 안으로 들어서자, 조용한 배경음악과 함께 펼쳐진 옛 리스본의 지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조명 아래, 오디오 가이드를 귀에 대고 리스본의 옛이야기 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우리는 안내를 따라 고대 문명에서 시작해 대항해시대를 거쳐 현대의 리스본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역사적 궤적을 따라 걸었다.
16세기의 창고를 재현한 공간에서는 카라벨라 선박에 실려온 신대륙의 향신료와 물품들이 놓여 있고, 그 향기 속에서 한때 ‘세계의 항구’로 불리던 리스본의 위용이 되살아난다. 이곳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도시의 기억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책장 같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수백 년 전의 이야기가 속삭이듯 들려오는 듯했다.
세계의 중심이었던 도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대항해 시대의 찬란함이었다. 스크린 가득 펼쳐진 범선의 돛과 파도 소리, 뱃머리를 가르며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상은 마치 내가 그 시대의 항해자가 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마젤란과 바스코 다 가마. 이름만으로도 가슴 뛰는 이 인물들의 항로와 유물들이 차례로 펼쳐졌다. 리스본이 한때 세계의 중심이었음을, 모든 대양으로 향하는 출발점이었음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전시였다.
향신료를 가득 실은 무역선, 황금빛으로 빛나는 보물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항구 도시의 풍경. 그 모든 이미지가 당대의 번영과 호기심, 그리고 힘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화면 속 리스본은 단순히 부유한 도시가 아니라, 세계를 향한 꿈과 야망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눈빛 속에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보다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대항해 시대의 찬란함이었다. 스크린 가득 펼쳐진 범선과 파도 소리, 뱃머리를 가르며 나아가는 영상은 마치 그 시대의 항해자가 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마젤란과 바스코 다 가마, 이름만으로도 가슴 뛰는 인물들의 항로와 유물은, 리스본이 한때 세계의 중심이었음을 실감 나게 보여주었다. 향신료, 황금, 무역선—그 모든 이미지가 당대의 번영과 호기심, 그리고 힘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한순간에 무너진 영광 그리고 새로운 도시의 탄생
하지만 영광의 그림자 뒤엔 커다란 상처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전시실로 옮겨가는 순간,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고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1755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날’에 일어난 리스본을 집어삼킨 대지진을 생생하게 재현한 공간이었다.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 발밑에서 전해지는 진동,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 겨우 몇 분이었지만, 나는 마치 재난 한복판에 들어선 듯한 압도감에 사로잡혔다. 스크린과 음향, 흔들리는 바닥을 통해 재현된 그날의 참상은, 리스본이라는 도시가 어떤 상처 위에 다시 세워졌는지가 생생히 전해졌다.
지진 이후 밀려온 쓰나미, 그리고 도시를 집어삼킨 대화재. 전시는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온몸으로 리스본의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화면 속에서 무너지는 건물들, 불타는 거리들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 도시가 겪은 상실은 단순히 건물과 재산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수백 년간 쌓아온 기억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던 도시가, 하루아침에 폐허로 변해버렸다.
이어 등장하는 퐁발 후작은 폐허 위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개혁자의 얼굴로 나타난다. 그는 재건된 도시의 청사진을 펼쳐 보이며, 리스본을 근대적 도시로 변모시켰다. 혼란과 절망의 끝에 나타난 폼발 후작은 도시 재건을 이끈 지도자이자, 새로운 리스본의 설계자였다. 그의 계획과 지휘 아래 폐허 속에서 다시 태어난 도시는, 단순한 복구가 아닌 '재창조'였다.
전시실에 펼쳐진 정교한 모형들을 보며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도시 계획과 건축 기술들.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내진 구조, 넓고 반듯하게 뚫린 도로, 체계적으로 배치된 광장들. 폼발 후작은 단순히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꿈꿨다. 나는 마치 그 시대의 장인들이 내 옆에서 하나하나 벽돌을 쌓고, 설계도를 펼쳐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상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바이샤 지구의 건물들을 보면서, 이것이 단순한 재건이 아니라 희망의 재건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의 의지가, 오늘날 우리가 걷는 리스본의 거리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마지막 전시실에서는 오늘날의 리스본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두의 애절한 선율이 은은하게 흐르고, 축제와 일상의 풍경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알파마 골목을 걷는 사람들, 트램 28번을 타고 언덕을 오르는 여행자들, 코메르시우 광장을 평화롭게 거니는 가족들. 과거의 상처를 딛고, 여전히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도시로 이어진 리스본의 오늘이 거기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며, 나는 이 도시가 단지 오래된 건물의 집합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리스본은 과거와 현재, 영광과 고통, 상실과 회복이 켜켜이 겹쳐진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1시간의 관람은 끝났지만, 리스본이라는 도시를 이해하는 여행은 이제 막 시작된 것 같았다.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다시 나왔을 때, 같은 풍경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발밑의 칼사다 하나하나,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 테주강을 향해 펼쳐진 탁 트인 시야. 모든 것이 이제는 수백 년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