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가의 여운
브라가(Braga)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늘을 보니 마음 한구석에 작은 아쉬움이 스쳤다. 포르투갈 북부의 아름다운 도시, 브라가와 장엄한 봉 제수스 두 몬테 성소를 당일치기로 둘러볼 예정인데,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기세였고, 일기예보에도 하루 종일 비가 예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빗속에서 피어난 특별한 추억은 그 어떤 화창한 날씨보다 깊은 잔상으로 남았다.
오전 9시 45분, 포르투의 상벤투역은 아침부터 회색빛 구름에 덮여 있었으나, 역 안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아줄레주 타일 벽화는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잃지 않았다. 포르투-브라가 기차는 약 1시간 소요되며, 요금은 왕복 7.1유로였다. 전날 예매해 둔 브라가행 기차표를 손에 쥐고 플랫폼으로 향했다. 혹시 모를 비에 대비하여 챙겨 온 우산이 왠지 모르게 든든했ㅇ다.
정각 10시, 기차는 미끄러지듯 출발하였다. 포르투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북부 포르투갈의 구릉지대는 비에 젖어 더욱 짙푸른 초록빛을 띠었다. 포도밭과 소규모 마을들이 스쳐 지나가는 약 1시간의 기차 여행은 빗소리와 함께 잊을 수 없는 서정적인 풍경을 선사했다.
'포르투갈의 로마'에서 만난 중세의 비
오전 11시, 브라가역에 도착했는데 비는 여전히 제법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펼쳐 들고 역을 나서자, '포르투갈의 로마'라고 불리는 브라가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빗속에서도 여실히 느껴졌다. 포르투갈 북부에 위치한 브라가는 풍부한 역사와 종교적 유산으로 가득 찬 매력적인 도시다. 리스본과 포르투에 이어 포르투갈 제3의 도시이며, 2025년에는 포르투갈 문화 수도로 선정되어 더욱 주목받고 있다. 빗방울이 돌길에 튀는 모습은 오히려 이 도시의 중세적 정취를 더욱 깊게 만들어주었다.
브라가는 기원전 20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도시 곳곳에 잘 보존된 로마 유적과 유물들이 남아 있어 고대 로마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 가톨릭 대교구가 위치한 브라가는 이베리아 교구장 주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기도하는 도시"라는 별명처럼 수많은 성당과 종교적 명소가 있다. 특히 부활절 주간에 열리는 성주간 축제는 매우 유명하다. 우산을 받쳐 들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브라가 대성당(Sé de Braga)이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11세기말부터 지어지기 시작하여 증축을 거듭하며 다양한 건축 양식이 섬세하게 혼합되어 있는 대성당은 빗속에서도 그 웅장함을 잃지 않았다.
대성당 내부로 들어서자, 외부의 궂은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고요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온몸을 감쌌다. 묵직한 돌벽과 높은 천장은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고, 창문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은 성스러운 공간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견고함이 주는 안정감 속에서, 섬세하게 조각된 제단과 성가대석의 목조 작품들은 굳건한 신앙심과 예술적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는 듯했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은은한 색을 띠며 고요한 감동을 선사하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벽면, 그리고 역사의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무덤들은 이 성당이 단순한 건물을 넘어선 살아있는 역사임을 말해주었다.
대성당 주변의 구시가지를 천천히 거닐며, 빗물이 만들어내는 운치와 잘 보존된 전통적인 건물들 속에서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기분을 만끽하였다. 브라가는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고루하지 않았다. 미뉴 대학이 자리 잡고 있어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쳐흐르며, 2012년 유럽 청년 수도로 선정된 이력이 이를 증명하는 듯했다. 고색창연한 유적지 사이사이로 현대적인 건축물과 활기 넘치는 카페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다양한 산업이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 도시가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대성당 맞은편으로 고요하면서도 화려한 산타 바바라 정원(Jardim de Santa Bárbara)이 빗물에 젖은 채 펼쳐져 있었다. 중세풍 구 대주교 관저를 배경으로 절정을 맞은 계절의 꽃들이 물기를 머금고 더욱 선명하게 피어나 있었다. 장미의 붉은빛과 라벤더의 보랏빛이 빗방울에 반짝이며, 진한 흙냄새와 촉촉한 꽃향기가 공기 중에 번졌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옷깃을 적시고, 발밑의 돌길은 빗물로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걸어야 했다. 비 때문에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정원은 한층 고요했고, 물기 어린 풍경 속에서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도심을 걸으며 빗속에서 더욱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는 아르코 다 포르타 노바(Arco da Porta Nova)가 눈앞에 나타났다. '새로운 입구의 아치'라는 이름에 걸맞게, 18세기 바로크 장식을 간직한 석문이 흐린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묵묵히 서 있었다. 우산을 기울이며 아치 밑을 지나자 빗방울이 포석 위에 부드럽게 부딪히고, 젖은 돌길이 은빛 물결처럼 반짝였다.
이윽고 헤푸블리카 광장(Praça da República)에 들어서니, 그칠 줄 모르는 빗속에서도 도시의 맥박은 여전했다. 광장 중앙의 분수가 부드러운 물줄기를 뿜어 올리며 주변에 안개 같은 잔 물보라를 흩뿌렸고, 그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어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우산을 든 사람들이 분수 주변을 지나다니고, 카페테라스에서는 김이 나는 커피가 빗방울과 함께 향기를 퍼뜨렸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이 모든 풍경을 바라보니, 브라가의 일상이 차분하면서도 힘차게 다가왔다.
숨겨진 보석에서 맛본 미식의 감동
헤푸블리카 광장을 즐긴 우리는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와 활기찬 에너지가 공존하는 도시 브라가에서, 단순한 식사를 넘어선 미식 경험을 선사한 숨은 보석 같은 레스토랑, 이나투 비스트로(Inato Bistro)를 만났다. 브라가의 오래된 골목 사이 한적한 거리에 자리한 'INATO'는 미쉐린 가이드의 '빕 구르망(Bib Gourmand)'에 선정된 작은 비스트로로, 기대 이상의 감동으로 우리의 미각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나투 비스트로는 브라가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난, 조용하고 고즈넉한 골목길에 자리한다. 화려함보다는 절제된 세련미가 돋보이는 외관은 은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조명과 아늑한 공간감이 우리를 감쌌다. 짙은 원목과 현대적인 디자인이 조화를 이루는 인테리어는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벽면의 추상화와 은은한 재즈 선율은 이곳이 미식과 예술이 공존하는 공간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빕 구르망'은 합리적인 가격에 훌륭한 음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에 주어지는 미쉐린 가이드의 상징이다.이나투 비스트로는 그 약속을 뛰어넘는 감동을 선사했다. 메뉴판을 받아 든 순간부터 범상치 않은 창의성이 느껴졌다. 전통 포르투갈 요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다채로운 메뉴들은 하나하나 흥미로웠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했다.
친절한 직원의 도움으로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처음 제공된 식전빵은 수제 곡물빵과 허브 포카치아, 그리고 아조레스 버터와 후무스 스프레드였다. 깊고 진한 풍미의 버터는 부드럽게 녹아들었고, 포카치아와 어우러져 고소한 우유 향을 입안 가득 채웠다. 후무스는 전통적인 맛에 흑깨와 파프리카 가루가 더해져 미묘한 오리엔탈 뉘앙스를 풍겼고, 고소함 뒤에 은은한 매콤함이 입맛을 조심스럽게 깨웠다. 곡물빵은 폭신한 속과 견고한 껍질의 대비가 좋았고, 씹을 때마다 곡물의 향이 풍성하게 터져 나왔다.
애피타이저로 주문한 절인 고등어(Cavala Curada)는 짙은 바다 향을 품었지만, 강하지 않고 정제된 염도로 조율되어 오히려 날것보다 더 풍부한 바다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 살짝 그을린 껍질 위에 아보카도 퓌레와 고추냉이 크림, 검은 캐비어가 얹혀 짙은 맛과 크리미함, 알싸함이 입안에서 층을 이루며 짧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가볍게 풍기는 스모키 함 뒤로 아보카도의 크리미함과 고추냉이의 알싸한 여운이 섬세하게 맞물렸고, 마이크로 허브와 캐비어의 미세한 식감은 입안에서 완벽한 화음을 만들었다.
함께 주문한 콜리플라워 튀김은 무겁지 않은 바삭함으로 시작해 놀라울 만큼 촉촉하고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냈다.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향신료 마요네즈는 마치 야채가 주인공이 되는 작은 반전을 연출하는 듯했다. 절인 고등어와 콜리플라워 튀김은 서로 대조적이면서도 하나의 대화처럼 조화를 이루며, 바다와 밭, 지방과 신선함이 교차하는 찰나의 리듬을 선사했다.
메인 요리인 농어구이는 시각적으로나 맛에서나 탁월한 균형을 보여주었다. 농어는 기름 없이 바삭하게 구워진 껍질이 칼질할 때마다 사각 소리를 냈고, 속살은 완벽한 미디엄 쿠킹으로 촉촉하게 유지되어 담백한 바다의 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간결하게 조리된 홍합은 짭조름한 해산물의 풍미를 더했고, 얇게 슬라이스 되어 돌돌 말린 당근은 단맛과 스모키 한 뉘앙스를 동시에 전했다. 접시 바닥에 깔린 살짝 감귤류의 산미가 있는 소스는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주며, 마치 해안선을 따라 걷는 여름 저녁의 청량함과 따뜻함, 그 모든 감각을 이 한 접시가 대신하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나온 소꼬리 샌드위치와 트러플 소스는 겉보기엔 가장 단순했지만, 가장 깊은 풍미를 품고 있는 미니어처 극장 같았다. 오랜 시간 조려진 소꼬리 고기는 젤라틴처럼 녹는 질감과 진한 풍미를 자랑했고, 부드러운 포카치아와 이상적인 밸런스를 이뤘다. 위에 올려진 크림은 트러플과 생크림이 어우러진 휘핑으로, 코끝을 자극하는 향과 함께 깊은 감칠맛을 더했다. 작지만 인상적인 이 한 입은 미식이란 단어의 깊이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했고, 기억 속에 오래 남을 "한 입의 감동"이었다.
비록 우리가 디저트를 주문하지는 않았지만, 주변 테이블에서 마스카포네와 캐러멜이 담긴 접시가 지나갈 때마다 공기 중에 퍼지는 바닐라 향과 과일의 단내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이나토 비스트로의 요리들은 단순히 아름답거나 맛있는 차원을 넘어서, 음식 하나하나에 스토리와 리듬, 조화의 철학이 담겨 있는 듯했다. 형식과 정성, 그리고 창의성까지, 마치 잘 편곡된 실내악을 듣는 듯한, 입안의 교향곡이었다.
이나투 비스트로에서의 식사는 단순한 외식이 아닌, 하나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경험이었다. 모든 요리는 아름답게 플레이팅 되어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었고, 한 입 한 입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맛의 조화는 미각을 완전히 만족시켰다. 음식만큼이나 훌륭했던 것은 직원들의 친절하고 전문적인 서비스였다. 메뉴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와인 페어링 추천, 그리고 식사 내내 불편함 없이 세심하게 챙겨주는 모습은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브라가의 이나투 비스트로는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미식의 기쁨을 안겨준 진정한 숨은 보석이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브라가 여행을 더욱 풍성하고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포르투갈 미식의 수준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었다. 브라가를 방문한다면, 이나투 비스트로에서 빕 구르망의 진정한 가치와 함께 영혼을 울리는 미식의 감동을 꼭 경험해 보길 강력히 추천한다.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