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5 스타트업에서 아빠 육아휴직 쓴 유니콘(?)
공식 육아휴직은 10월 초부터지만 추석~한글날 연휴 사이사이에 휴가를 끼워넣음으로써 오늘이 마지막 출근날이었다. 일반 기업을 다니다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것이 작년 10월인데, 만 1년을 채우고 휴직하게 되었다. 혹자는 스타트업에서 육아휴직을 쓸 수 있냐고(or 써도 되냐고) 물어보기도 하지만 대표님이 쿨하게 수락해 주시기도 했고 회사마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으니 그 분위기 상으로는 쓰는 데 크게 무리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출근을 하는데 처음 이곳에 발을 내딛었던 추억이 많이 떠올랐다. 회사는 상당히 언덕배기에 위치하여출근을 위해서는 지하철역에서부터 꽤나 긴 경사를 걸어 올라야 했다. 가을에서 겨울 넘어가는 시기에 처음 왔으니 날씨를 벗삼아 무리 없이 올라갔지만 한겨울이 되니 그늘진 도로의 추위가, 한여름이 되니 푹푹 찌고 습한 더위가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작은 등반을 완료하고 사무실에 발을 내딛으면 더할 나위 없는 아늑함이 느껴졌다. 이전에 다니던 기업의 사옥은 아주 삐까번쩍하고 신식이어서 모든 것이 편했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곳이었기에 아늑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곳은 나름 깔끔하게 구획되어 있고, 어느 자리에 누가 있고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 얼추 다 파악할 수 있었다. 냉장고와 커피머신, 미니바와 각종 가구들이 모여 있는 라운지도 내가 이 곳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무엇보다도 이 공간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지구와 함께 성장했다는 것이다. 첫 출근을 한 지 불과 며칠이 안 되어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내의 배 안쪽에서 지구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평일 하루하루를 회사에서 보내며 회사의 성장과 나의 성장을 도모하는 동안 지구는 엄마로부터 영양분을 받으며 조금씩 성장해 갔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또 얼마나 좋은지. 언제나 축복이(지구의 태명)는 잘 자라고 있는지 안부를 물어봐 주었고, 업무와 가정의 밸런스를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으며, 마침내 지구가 태어났을 때 회사의 1호 베이비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래서 지구가 백일이 되는 9월 둘째주에 회사 모든 구성원에게 백일떡을 돌렸는데, 아무도 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가 너무나 하고 싶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백일떡을 주문해 구성원 한 명 한 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백일이라는 시간 동안 지구가 건강히 잘 자란 것은 그저 나와 아내가 잘 해서가 아님을, 주변 모든 사람들이 축복해주고 진심으로 응원해주었기에 가능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 구성원 대부분이 아주 젊은 주니어 연차였기 때문에, 큰 조직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던 각종 경조사에 따른 축하와 답례 문화를 느껴봤으면 하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과연 육아휴직 복귀 시점의 회사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하루 하루가 다른 스타트업의 속도를 생각해 보면, 6개월은 회사의 존폐가 좌지우지될 정도로 긴 기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요즘 같이 경기가 불안정할 때라면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 구성원들도 6개월 후에는 얼마나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을 지도 정말 모르는 일이다. 물론 젊은 대표님의 치밀한 분석력과 수행력, 넓은 인맥은 내년의 회사 전망을 밝게 만들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어쨌든 사무실의 한 자리 한 자리에 있던 이 시점의 동료들에게는 마치 마지막인 양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만 8년이 되는 시점에, 6개월이라는 work-free 기간을 얻게 되었다.
잘 준비하여 지구와의 시간을 알차게 채워나가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