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함께한 탄핵 소추안 가결 집회
2024년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우원식 의장이 '가결 204표!'를 말하자 여의도는 함성과 울음소리로 뒤덮였다. 거리의 국민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작은 성취의 기쁨과 고생했다는 인사를 나누었다. 눈이 올 거라던 일기예보와 달리, 날씨는 맑고 따뜻했다. 나의 마음은 더없이 뜨거웠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나도 한국인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다. 평소의 한국인들은 무관심하고 차갑다. 상대방에게 크게 관심도 없고, 외국에서는 흔히 나누는 눈인사도 잘하지 않는다. 만원 지하철에서 누군가를 툭 치고 지나갈 때도 '실례합니다.'같은 말 따위는 건네지 않는다. 그냥 그게 기본자세다. 옆 집과 안부를 나누거나 넉넉히 한 반찬을 나누는 건 아주 옛말이 되었고, 나 역시도 현재 사는 지역에 4년 넘게 살고 있지만, 남편 이외에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떨 때 한국인은 아주 뜨겁다. 특히 부당한 상황을 목격했을 때, 옳지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한국인들은 정말 뜨거운 김을 뿜어내며 한 데 뭉친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을 자행하거나 거칠어지지도 않는다. 그저 한 곳에 모여 목소리를 높이고 노래를 부르고 함께 춤을 춘다. 그냥 희로애락을 함께할 뿐 경찰차를 불태우거나 총을 쏘거나 몽둥이로 누구를 두들겨 패지도 않는다. 쓰레기를 줍고, 간식을 나눠 먹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위해 온기를 나눈다.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다. (나 포함)
이번 집회는 환갑이 지난 부모님과 함께했다. 집회 전 날 엄마와 통화에서 엄마와 아빠도 집회에 가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한 아줌마 아저씨랑 같이 갈 계획을 잡았다고 집회 현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날도 차고, 무릎도 아프고, 오가는 길이나 화장실도 불편할 텐데... 그래도 내색하지 않았다. 준비물 목록을 메신저로 보내줄 테니 잘 챙겨서 조심히 오라는 말만 남겼다. 아빠는 허리가 아파서 바닥에 앉지도 못하는데.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집회 당일 엄마아빠는 나보다 더 먼저 국회의사당역에 와 있었다. 같이 오기로 한 다른 분들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함께 오지 못했고, 엄마와 아빠만 안산에서 신길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와서 국회의사당역까지 걸어왔다고 했다. 나는 함께 있던 친구들에게 부모님을 모시고 오겠다고 얘기하고 엄마 아빠를 만나러 집회 무대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그리고 그날 나는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300m도 되지 않는 곳을 가는데 40분이 넘게 걸렸다. 중간중간 병목이 생기고 사람들끼리 엉켜 옴싹달싹하지 못하는 일들이 생겼다. 그럴 때마다 모두 입으로 '천천히, 천천히'라고 구호를 외치며 조금씩 길을 터주고 양보하며 진행로를 정돈했다.
아빠와 엄마는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 기둥에 딱 붙어 서 있었다. 가까스로 아빠의 소매를 잡고 '힘든데 어떻게 왔어! 다른 분들도 못 온다면서..'라고 첫마디를 건넸다. 아빠와 엄마는 '그냥 왔어. 와야 할 거 같아서. 눈으로 보고 같이해야지.'라고 답했다. 그때가 오후 3시. 오전에 아침만 먹고 점심도 못 드셨다고 했다. 그렇지만 표정은 생기가 넘쳤다.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멋지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 같은 마음이라니. 엄마도 너무 감동이야.' 엄마는 한껏 고무된 채 집회에 참여했다. 함께 구호를 외치고 피켓을 들어 올리기도 했다. 아빠는 이 상황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며 연신 동영상과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보냈다.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국회의사당역 역사를 통과해 햄버거 가게에 가서 자리를 잡고, 햄버거 세트를 시켰다. 허기가졌던지 두 분은 햄버거를 맛있게 드셨다. 그리고 거기서 탄핵안이 가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엄마와 아빠, 나는 함께 울었다. 엄마는 옆자리에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는 아이에게 '너무 고생했다! 아주 잘했다'는 따뜻한 칭찬을 건넸다. 그리고 거리로 나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불빛을 휘두르며 오늘의 이 작은 성취를 축하했다. 그 현장에서 늦게 합류한 동생을 만났고 우리 네 식구는 얼싸안고 또 한 번 울었다.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에게 '민주화'란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아빠에게 민주화는 '미안함'이라고 했다. 80년 대 옳은 일을 하다 이유 없이 죽거나 사라진 대학생들을 도와주지 못한 샐러리맨 아저씨가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본인이 좀 더 똑똑하거나 용기 있었으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가서 함께 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화가 더 소중하다고 했다.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누군가 희생하며 대신했고, 그 덕에 우리가 이렇게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그 미안함을 갚는 방법으로 아빠는 '많이 알기 위해 배우기'를 택했다. 우리 아빠는 그저 은퇴한 일반인이지만 근현대사의 모든 이야기를 거의 다 알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훌륭한 밥상머리 선생님이다.
엄마에게 민주화는 '사랑'이라고 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다른 이에 대한 존중. 어떤 권력이 다른 누군가를 이유 없이 핍박하지 않는 것. 엄마에게 민주화란 따뜻함이었다. 80년 대 광화문 덕수제과에서 친구를 만나려고 가는 길 위의 최루탄의 매운 내가 엄마에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눈물을 흘리며 까닭 모를 두려움에 서울역으로 뛰어갔던 스무 살의 엄마에게 민주화는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따뜻함과 사랑의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설명하는 유튜브 방송에서 민주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제도권 교육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에 교과서의 개편과 교사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사실상 58년생인 아빠와 61년생인 엄마는 민주주의에 대해 정규 교육 안에서 배운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 모든 순간을 목격하고 경험함으로써 '민주주의'라는 것을 스스로 정의하고 체화했고,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자 국회의사당으로 나왔다. 모든 것을 이론으로써 당연한 것으로 배운 우리 세대와는 또 다른 차원의 노력이었음에 분명하다. 그 마음을 부모님은 '그냥 나와야 할 것 같아서'로 간결하고 투박하게 얘기했다.
한국인이 이상한 건 어쩌면 이런 점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자신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헛되이 넘기지 않고 상상하고 공감하고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면서, 형태가 없는 것들을 열심히 정의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을 정성껏 알려주기 위해 애쓰면서. 이 과정과 시간이 켜켜이 쌓여 평소에는 무심하고 냉랭하게 팍팍한 현실을 버티며 살아내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엄청난 열기와 빛을 발하는 이상한 국민성을 만들어낸 건 아닐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DNA라는 말로 설명해야 하나. 민주주의란 잘못된 것을 시민의 힘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것 또한 포함된다고 한다. 잘못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축제 같은 집회 현장을 만든 모든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