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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chic Apr 08. 2023

칠. 신전 기둥에 앉아 온천욕 하기

파묵칼레. 치유의 도시에서 씻은 듯이 나아졌다.

뜨거운 햇볕 속에서 마치 만년설 같은 새하얀 언덕을 보고 있자니
여기가 현실이 맞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고 카흐발트를 먹었다. 뷔페식 식당에는 신선한 토마토, 올리브, 치즈, 갓 구운 시미트를 비롯해 로쿰과 바클라바와 같은 달콤한 터키쉬 딜라이트까지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아침 식사를 가장 공들여 먹는다고 한다. 커피(카흐)를 마시기 전 먹는 음식이란 뜻인 카흐발트는 튀르키예식 아침을 뜻하는 말인데 사실 우리나라에서 천상의 맛으로 알려진 물소젓 크림인 카이막도 카흐발트의 단골 메뉴다. 나와 상정은 신선한 채소와 구수한 향을 뿜어내고 있는 시미트를 접시 가득 담아 먹으며 하얀 언덕 위를 오를 준비를 단단히 했다.

숙소 창문에서 보이는 석회붕의 모습
카흐발트 든든히 챙겨 먹고 가보자!

옷 속에 수영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챙겼다. 파묵칼레의 하얀 석회붕은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걸어 다녀야 하기 때문에 신발을 넣을 비닐 가방도 따로 넣었다. 호텔 리셉션에서 주차장 등의 간단한 정보를 얻고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새로운 장소를 향한 또 다른 시작이다. 남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석회붕과 맞닿아 있는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를 먼저 구경했다. 히에라폴리스는 온천수가 흘러내리는 석회 언덕 때문에 번영한 고대 도시.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위한 휴양과 요양을 목적으로 방문했다고 한다. 고대 도시의 전형적인 건축물인 원형 극장과 신전터 등을 둘러보다 도로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네크로폴리스에 눈길이 멈췄다. 네크로폴리스는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뜻으로 쉽게 말해 무덤의 행렬이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히에라 폴리스에 방문했지만, 끝내 치유되지 못한 사람들이 모인 도시. 가족이나 주변 사람이 크게 아파본 사람은 아마 알 것이다. 제발 괜찮아지길 바라는 그 간절하고 아득한 마음. 그 바람 속에서 너무도 작게 느껴지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할아버지가 걷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랬고, 엄마가 더 이상 앞을 못 볼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그랬다. 의사 소견서를 들고 대형 병원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붉어지는 눈시울을 들키지 않으려고 백번은 삼켰던 마른침을 기억한다. 거대한 병원이었던 히에라폴리스와 죽은 자들이 주인인 네크로폴리스를 바라보며 온천물에 몸을 담가 나쁜 기운이 제발 빠져나가길 바랐던 이들의 아득하고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먹먹했다.

히에라 폴리스 전경

드디어 석회붕에 맨발을 디뎠다. 생각보다 딱딱하고 거칠었다. 발바닥에는 지압 슬리퍼라도 신은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파묵칼레 석회붕은 탄산칼슘 성분이 과포함된 온천수가 흐르면서 퇴적돼 생긴 천연 석회 온천이다. 이색적인 풍경 덕분인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관광객들이 석회붕을 둘러보며 즐기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커다란 날개 모형을 가지고 다니면서 천사 콘셉트로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포토그래퍼들이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고, 관광객들은 각자 유행이나 취향에 따라 가장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흰 석회 벽에 바짝 붙어 매혹적인 몸짓을 하는 젊은이들을 비롯해 단체 방문을 기념하며 모두가 어깨동무를 하며 팀워크를 자랑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순간 포착 파파라치 컷을 노리는 커플들까지 석회붕을 채운 많은 사람들은 새하얀 석회 도화지를 배경으로 저마다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했다.

사람이 많았다.

나와 상정은 입고 온 옷을 벗고 수영복 차림으로 석회 온천에 몸을 담갔다. 물은 따뜻했다. 탁한 온천수 속에 손을 넣자 진흙 같은 질감의 석회가 부드럽게 만져졌다. 우리는 서로의 팔과 다리에 석회를 바르며 건강을 기원했다. 피부 위에 얹어진 석회는 햇볕에 곧 뻣뻣하게 말려졌다.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하나씩 웅덩이를 옮겨 다니며 눈으로, 몸의 감각으로 석회붕을 느끼며 또 다른 튀르키예를 경험했다. 200km 단위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반도의 지층 속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탈의 전. ARTIST라고 써진 티가 좀 웃기다. 사실 정말로 예술가가 되고 싶다.
탈의 후. 너무 많이 탔네

석회 몸에 온통 석회분칠을 한 채로 앤티크 풀로 향했다. 클레오파트라도 수영을 즐겼다는 앤티크풀은 별도로 티켓을 끊어야 들어갈 수 있는 유료 온천 수영장. 우리는 티켓을 끊고 소지품을 보관함에 맡긴 후 맑은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물속에는 신전의 기둥이나 머리 장식 등 여러 조형물이 놓여 있었다. 유적에서 수영이라니! 신전 기둥 위에 앉아서 온천욕이라니! 평생 다신 할 수 없을지 모르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뛰었다. 또 한편으로 자연과 시간이 변화시킨 결과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문화재를 보는 시각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복원이라는 개념은 사실 변함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인간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무너진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는 튀르키예의 수많은 ruins는 현재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상정과 나는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다양한 조각들을 구경하며 온천욕을 즐겼다. 단신인 나에게 앤티크 풀의 물은 꽤나 깊었다. 특히 온천욕은 카쉬의 지독한 모기에 물려 가려웠던 몸에 특효가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카쉬 숙소 침대 머리맡에 모기약을 두고 오는 바람에 며칠간 다리를 벅벅 긁어대며 괴롭게 보냈는데.. 정말 깨끗히 괜찮아졌다. 괜히 씻은 듯이 괜찮아졌다는 표현이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평화롭고 아름답다. 천연 모기약.
유적 위에서 온천욕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이후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수영장 수영으로 한 판 마무리한 뒤 (이왕 젖은 김에), 전화로 미리 예약한 레스토랑인 히에라 커피 앤 티하우스에서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는 메네멘을 먹었다. 그리고 석회붕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을 보며 모든 것들이 수월히 잘 흘러간 하루에 감사했다. 앞으로 일정은 셀축과 이스탄불만 남았다. 길었던 일정표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텍스트였던 지명과 일정이 현실이 되는 경험은 해도 해도 새롭고 즐겁다. 

친절한 사장님과 정말 정말 맛있는 음식들
티와 석기시대 초콜릿과 빵까지. 후식까지 완벽
아름다운 파묵칼레의 석양

덧.

앤티크 풀 안에서는 지정된 사진사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가지고 입장할 수 없다. 물속에 있는 모습을 찍지 못해 아쉬웠지만, 돌이켜보면 덕분에 오롯이 온천욕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히에라 커피 앤 티하우스는 예약제다. 구글 맵에서도 예약이 되지만, 더 빠르게 예약하고 싶거나 당일 예약이 필요하면 전화 해보길 권한다. 사장님이 친절하고 또박또박 영어로 예약을 잘 받아주신다. 그리고 레스토랑 안에서 흘러간 옛 K-Pop 아이돌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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