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린제. 좋은 술은 여행하지 않는다!
셀축으로 가는 도중 나와 상정은 계획에 없던 '쉬린제'라는 작은 마을을 들렀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정 중간중간 소소한 일정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게 자동차 여행의 가장 큰 묘미다. 우리는 급하게 빌린 오래된 소형차 덕분에 예상치 못한 곳들을 방문하고 새로운 추억을 쌓는 횡재를 누리고 있었다. 인생은 정말 뜻대로 되지 않고, 언제 불운이 행운으로 행운이 불운으로 바뀔지 모른다. 정말 인샬라 마샬라의 연속.
우리는 쉬린제에서 햇빛을 가득 담은 튀르키예의 과실로 담근 와인들을 맛볼 수 있다는 리뷰에 홀딱 넘어갔다. 튀르키예는 다종교 국가이지만 이슬람교도들이 많은 국가로 술을 찾기도 어려운 편이고 가격도 높은 편이다. 관광객들에게는 EFES와 TUBORG와 같은 맥주를 판매하긴 하지만, 다른 식음료 물가에 비하면 굉장히 비싸다. 쉬린제는 15세기 무렵 그리스인들이 이주해 형성한 마을로 1923년 로잔 평화협정이 있은 후 그리스와 튀르키예 간 인구 교환 때 떠나지 않고 머무른 그리스인들의 후예가 아직도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곳의 주민들은 그리스 정교를 믿으며 덕분에 다른 튀르키예 지역보다는 쉽고 편리하고 비교적 저렴하게 지역의 술을 맛볼 수 있다.
"좋은 술은 여행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위스키 성지 여행]이라는 책에서 처음 꺼내고 소설가 김영하가 본인의 책 [여행의 이유]에서 다시 한번 인용한 문구인데, 나는 술맛도 잘 모르고 잘 마시지도 못하지만 저 한 줄의 문장이 참으로 좋다. 특히 여행지에서 술을 마셔야 할 때면 저 문구가 꼭 뇌리에 떠올라 그 지역의 와이너리에서 생산되거나 해당 지역의 특산품으로 만든 술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 선택에 대해서는 후회한 적이 없다. 맛도 맛이지만 이 재료들로 술을 만들게 된 경위, 지형적 특징, 술을 소비하는 날씨나 계절 혹은 상황에 대해 알게 되면 그 결과로써 빚어진 이 한 병 술의 무게가 달라지는 느낌이 재밌다. 우리는 차가 있으니 남편은 테이스팅을 하지 않고, 내가 맛을 본 다음 두 병 정도를 숙소에 들고 갈 계획을 세웠다.
마을은 초입부터 과실주와 꿀과 같은 지역 특산품과 각종 물건을 파는 가판대로 활기찼다. 맑은 하늘과 바람이 솔솔 부는 기분 좋은 날씨 덕분에 마을은 너무 아름다웠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 골목 구석구석을 걸었다. 하얀 외벽에 빨간 지붕의 가옥들이 그리스의 느낌을 물씬 자아냈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에서는 뜻하지 않는 풍경들을 맞딱들이기도 했는데 버섯 모양 테이블이 인상적인 튀르키예 커피 노점이 나타나기도 했고, 작은 나무 밑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조랑말을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의 이름은 1926년까지 티르키예어로 '못생긴, 추하고 더러운'이라는 뜻을 가진 '체르킨제'였다고 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복잡한 튀르키예의 역사를 살펴봐야 하는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15세기 기독교 성지인 고대도시 에페스(에베소)가 오스만제국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버려지고 이때 그리스인 노예들이 쉬린제 지역에 남게 되면서 오스만인들의 공격과 핍박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름을 '못생긴, 추하고 더러운'이란 뜻을 가진 '체르킨제'로 정했다고 한다. 1926년에서야 주 정부가 이곳을 '즐거운'이란 뜻을 가진 '쉬린제'로 지역명을 변경하였고 체르킨제라는 지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상정이 찾은 식당에서 튀르키예 가정식 요리를 시켜 먹었다. 튀르키예 음식은 하나 같이 모두 정말 맛있었지만, 이곳 괴즐레메의 환상적인 맛은 여행을 마친 지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와 상정 사이에서 출출해질 때마다 회자되고 있다. 팬에 직접 구운 얇은 밀가루 반죽에 신선한 치즈와 감자 고기를 넣고 랩핑 한 괴즐레메의 맛은 마치 청바지의 흰 티로도 모두의 시선을 끄는 멋쟁이 같았다. 소금 간만으로 맛을 냈지만 이 풍미는 무엇인가. 빵에서 느끼는 이 불향은 대체! 내 얼굴 양 옆으로 '미미(美味)'라는 두 글자가 스쳐 지나갔음에 틀림없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 몇 번 괴즐레메를 사먹었지만 쉬린제의 괴즐레메 맛과는 견줄 수 없었다. 지금도 먹고싶네.
내려오는 길에 와이너리에 들렀다. 카운터에서 원하는 술을 이야기하면 점원이 작은 잔에 따라주는 방식이었고, 나와 상정은 당도가 높지 않은 술을 좋아하므로 ‘달지 않은 ‘이라고 쓴 단어를 구글 번역기에 입력해 점원에게 보여주었다. 점원은 친절하게 몇 가지 술을 추천해 주었고 나는 튀르키예의 다양한 포도와 체리, 딸기로 담근 와인을 맛본 후, 그중 입맛에 맞는 와인을 두 병 골라 구매했다. 가격은 한 병에 약 만 오천 원 정도. 약간은 알딸딸한 생태로 포장된 병을 가지고 나왔다. 운전을 해야 하는 탓에 술을 맛보지 못한 상정은 숙소에서 펼쳐질 튀르키예 와인파티에 한껏 고무돼 있었다.
튀르키예면서 그리스 같기도 한 쉬린제에서의 골목 여행은 즐거운 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에 걸맞게 참으로 즐거웠다. 바닥을 포장한 돌들이나 가옥의 모양, 거리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을 살펴보는 것도, 걷다가 만난 교회에 들어가 어린 시절 가족 모두가 함께 예배를 드렸던 기억을 떠올렸던 것도, 손으로 만든 털실 인형을 파는 가판대에서 모두 다르게 생긴 인형의 생김새를 감상하는 것도, 인생 괴즐레메를 만난 것도 모두 소소하지만 하루를 꽉 채우기에는 모자람 없는 행복이었다. 거기에 맛도 가격도 좋은 튀르키예산 와인까지. 지역 주민들의 생활이 묻어 있는 골목을 배회하며 기쁨을 주는 작은 것들을 눈에 담고 맛볼 수 있어 감사하고 즐거운 하루였다. 다시 생각해봐도 이렇게 멋진 쉬린제에게 체르킨제라는 이름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