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디시아스. 남겨진 흔적으로 당신들을 상상합니다.
책 오른쪽 귀퉁이에는 '아프로디시아스'에 대한 소개가 짤막하게 실려 있었다.
카쉬에서 파묵칼레로 이동하는 날 아침. 아무 생각 없이 여행 가이드를 훑다 아프로디시아스에 대한 정보가 눈에 띄었다. 가이드에는 201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프로디시아스는 파묵칼레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고대도시이며, 오랜 세월을 겪어 왔지만 큰 파괴 없이 도시 전체가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고 소개돼 있었다. 나와 상정은 어차피 300km를 운전하는 김에 100km 정도를 더 써서 미와 사랑의 여신을 숭배했던 잘 보존된 고대 도시 아프로디시아스에 방문해 보기로 했다.
아프로디시아스로 향하는 도로는 한산했고, 덥고, 울퉁불퉁했다.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300km는 예상한 것보다 길었고, 우리는 아프로디시아스가 문을 닫는 오후 5시 전에 도착하기 위해 주유소 편의점에서 파는 샌드위치로 점심을 대충 때웠다. 대략 100km 구간을 기점으로 우리는 교대로 운전석에 앉았고, 상정의 두 번째 운전이 끝나갈 때쯤 아프로디시아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의 흔적만 남은 기존의 유적지와 달리 아프로시디아스는 정말 현존하는 도시에 가까웠다. 대리석 채석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석공을 길러내는 학교부터 시작해 신전과 극장, 원형 경기장, 온, 냉수 목욕탕과 아고라까지 수많은 대리석 건축물들이 동선에 맞게 배치돼 있었고 겪은 세월에 비해 상당히 완성도 있게 보존돼 있었다. 나와 상정은 표지판을 따라 도시의 이곳저곳을 탐방했다.
앞에 놓인 돌에 올라가 울타리 너머를 본 적도 있었는데, 돌이라고 생각한 구조물에 무엇인가가 조각이 되어있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내가 대체 뭘 밟은 건지. 하지만 곧 걷다가 채이는 모든 것들이 유적의 일부임을 발견했다. 이곳에서 발굴된 것들의 양이 너무 많아서 박물관에 보관된 일부 조각상이나 부조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떤 접근 금지 표시도 없이 곧 지어질 건축 자재처럼 땅에 놓여 있었다.
반질반질한 대리석으로 건설된 이 고대 도시를 둘러보는 사람은 채 10명이 되지 않았다. 어딜 가나 카메라 프레임에 함께 잡혔던 관광객들을 이곳에선 찾아볼 수 없었고, 셔터를 누르는 족족 휴대폰에는 빈 공간의 모습이 담겼다. 천천히 여유 있게 구석구석 돌아보며, 과거에 북적했을 아프로디시아스를 상상했다. 결국, 도시만 남았다. 건축물은 부서졌지만 사람 손이 타지 않은 덕분에 그 자리에 있었고, 뜨거운 햇빛도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도 그대로지만 사람만 사라졌다. 빈 도시에서 원형경기장을 가득 채웠던 3만 명의 환호성과 돌 다듬는 법을 배우던 학생들의 희로애락은 어디로 갔을까.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가 영상에서 우리는 모두 죽음의 상태로 오래 머물러 있다 잠깐 산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사실 우주의 관점에서 죽음의 상태가 자연스럽고 보편적이며 생의 상태가 예외적인 것. 사의 상태로 돌아간 고대인들이 남긴 흔적으로, 우리 사이의 엄청난 시간을 극복하고 잠시나마 아주 희미하게 그때의 삶을 상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아 기쁘고 고마웠다. 아주 오랜 시간 후에 나도 누군가에게 흔적으로 남을 수 있을까. 남는다면 어떤 흔적으로 남을까.
고대 도시 탐방을 마치고 예약한 숙소가 있는 목화의 성 파묵칼레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에서 모스크의 기도 방송을 들으며 튀르키예식 피자인 피데를 저녁으로 먹었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다가 상정의 뒤편에 있는 하얀 석회붕을 발견했다. 불과 1시간 전까지 머물렀던 곳과는 너무 다른 풍경. 같은 나라가 맞는지. 튀르키예는 정말 지루할 틈이 없다.
덧.
이슬람 사원 모스크에서 기도 시간마다 나오는 방송은 라이브다. 즉, 누군가 마이크를 잡고 부르고 있다는 것. 녹음해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마지막 여행지인 이스탄불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