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탈리아. 뜻대로 안 될 때는 과감하게 포기한다. 포기의 미덕.
역시,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륙 카파도키아 지역 괴뢰메에서 튀르키예 남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안탈리아까지 심야 버스 9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여기서도 나의 똥손이 활약했는데, 괴레메 버스 터미널의 수많은 버스 회사 중 나는 왜 하필 그 업체를 선택했으며, 많고 많은 자리 중 그 자리에 배정되었고, 또 그 자리는 왜 하필 고장 나 있던 것일까. 뒤로 완전히 젖힌 앞 좌석과 젖혀지지 않는 본인의 버스 좌석 사이에 끼워진 상정의 커다란 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받고 있었다. 그는 9시간 내내 몸을 뒤척이며 닌텐도 스위치 게임에 정신을 맡긴 채 하차의 순간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내 손을 찰싹찰싹 때리며, 미안한 마음으로 그가 겪고 있는 인고의 순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안탈리아는 튀르키예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가성비 좋은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인터넷에 안탈리아를 검색하면 '올인클루시브'라는 키워드가 연관 검색어로 추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안탈리아의 칼레이치 지역에는 잘 곳, 먹을 것, 마실 것을 모두 제공하는 올인클루시브 리조트가 많고, 이러한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배낭여행객이기 때문에 배낭여행객답게 저렴한 숙소를 예약하고 도보와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정말 이상한 부심이었다.
오전 7시 30분. 겨우 심야 버스의 늪에서 빠져나온 나와 상정은 안탈리아 오토가르(버스터미널)의 교통카드 판매기에서 카드를 발급받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카드 발급비용을 초과하는 100리라 화폐를 넣어줘도 너는 왜 받지를 못하니. 분통이 터진 채로 인터넷을 찾아보니 10리라, 20리라, 50리라만 넣어야 한단다. 호흡을 가다듬은 후, 버스터미널 안 구멍가게를 찾아 제로 콜라를 두 캔 구매하고 지폐를 바꿨다. 가까스로 카드를 발급하고 버스에 올라 카드를 태깅했다. 뭔가 불길한 빨간색 경고창이 단말기 화면에 나타났다. 기사님은 미안한데 안타깝게 됐다는 듯 '노 머니'라는 두 단어를 말해주셨고, 우리는 다시 버스에서 하차해 캐리어를 이고 500미터를 달려 카드에 돈을 충전했다. 다시 뛰어온 그 자리에 버스는 다행히도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후, 약 40분 동안 버스는 계속 머물러 있기만 했다.
마지못해 출발한 노 에어컨 찜통 버스는 수많은 승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우리의 캐리어는 버스가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할 때마다 휘청거렸다. 오전 9시, 구글이 알려준 정류장에서 하차하고 900미터를 더 걸어가 에어 비엔비로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2층 건물로 1층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고 2층에는 객실이 있었다. 식당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셰프는 너무 이른 시간 방문한 우리를 보고 흠칫 놀라며, 당신들의 방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며, 체크인은 두시라고 말해주었다. 앞으로 다섯 시간을 버텨야 침대에 누울 수 있다. 짐 가방을 맡기고 거리로 나왔다. 상정의 얼굴은 피곤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두웠다.
상정이 기쁘길 바랐는데 지쳐버린 그를 보며 속상하고 조금은 섭섭했다. 나의 마음이 얼굴에 보였는지, 상정은 차분하게 '나에게 시간을 좀 주면 회복할 수 있어.'라는 말을 건넸다. 근처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들이켜고 좌석에 앉아 햇빛을 쬐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여보! 나 결심했어! 포기할래!'
'뭐? 집에 가겠다고?'
'아니. 이상한 욕심들 다 포기할래. 버스 타고 다니겠다는 거, 사실 버스 타고 후진 데서 자고 그러는 거 짠내 나지만 거기에 낭만이 있다고 생각했던 내 고집이잖아. 이렇게 힘든데 그거 포기할래. 오늘 도착해서 낮에 안탈리아 올드타운 다 보겠다고 생각한 거 포기할래. 그냥 놓을래! 우리 편하게 가자. 내일 내가 렌터카 알아봐서 전화할게. 그냥 이제부터 자동차 타고 다니고, 오늘은 숙소에 들어가서 일단 푹 자버리자.'
'그래도 괜찮겠어? 계획이 좀 틀어질 텐데.. 당신 그런 거 싫어하잖아.'
'아냐 연습할래! 포기하기.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할 때야'
움켜쥐고 있던 마음을 놓자 모든 게 편안해졌다. 어떻게 되겠지. 상정의 얼굴은 한 결 밝아졌다. 렌터카 가격 비교 사이트에서 소형, 오토 자동차를 예약했다. 사실 한국에서 미리 대여하고 왔더라면 20만 원은 더 저렴했겠지만 '~했더라면'에 대한 것들을 다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몰라 국제 면허증과 휴대폰 차량 거치대를 챙긴 것만으로도 이미 난 만점을 넘어섰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커피숍을 나와 주변을 좀 걷다 점심으로 생선케밥을 하나 사 먹고, 곧장 숙소로 향했다. 레스토랑 2층에 위치한 숙소는 좁고 알 수 없는 웅웅 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우리는 재빨리 샤워를 마친 뒤 잠자리에 들었다. 낮 두시. 다른 때 같으면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냥 자버렸다. 졸리니까. 피곤하니까.
눈을 떠보니 이미 깜깜한 밤이 되어 있었다. 하루가 마치 삼일 같다. 배가 고파 근처에서 양고기 곱창을 다져 넣은 코코리치를 사 먹었다. 욕심과 미련을 포기하고 압박감이 사라지자 다시 여행이 즐거워졌다. 이 분주한 골목에서 사랑하는 상정과 양곱창을 씹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이후 이틀 동안 안탈리아에서는 예정대로 된 일이 없었다. 숙소의 웅웅 거리는 소리는 원인을 찾을 수 없었고 소음 속에 잠을 자기 위해서 우리는 냉장고와 에어컨을 포기하고 두꺼비 집을 내리는 결정을 감행했다. 원래 가기로 한 유명한 해변은 도보로 가기엔 먼 곳 이었고, 우린 포기하고 근처에 유료에다가 조금 낡은 프라이빗 비치에서 해수욕을 즐겼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크다는 안탈리아 박물관은 트램까지 갈아타며 애써 찾아갔지만 코로나로 운영시간이 단축되어 들어갈 수 없었고 화장실만 이용하고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좋아야 한다. 난 즐거운 경험만 해야 한다.'는 결론을 포기하니 새로운 것들이 보였다. 첫날 방문한 생선케밥 집에 또 갔다. 예전에 나 같으면 지역 맛집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었겠지만 이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러 갔다. 박물관 방문은 허탕 쳤지만, 오는 길에 진짜로 맛있는 수박주스를 싼 값에 마실 수 있었고, 바다가 보이는 멋진 후카바를 발견해 시샤도 즐길 수 있었다. 웅웅 거리는 소음이 은은히 울려 퍼지는 숙소는 튀르키예에서는 볼 수 없는 초고속 와이파이를 자랑했다. 마주치면 메르하바를 세 번 넘게 외치는 친절한 호스트는 젖은 우리의 수영복을 깔끔히 말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피데를 먹으러 갔지만 오전에는 팔지 않는다고 한 로컬 식당의 렌틸콩 수프는 진짜 끝내줬다. 예상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지만 예상보다 더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았다.
안탈리아를 떠나는 마지막 날 우리는 예약한 차를 받으러 공항으로 향했다. 비싸게 예약한 차는 자꾸 공기압을 체크하라는 경고등이 들어오는 낡은 2014년식 닛싼 미크라였고 매우 꼬질한 외관과 내부를 자랑했지만 콤팩트한 크기와 효율적인 연비 덕분에 이후 여정에 알뜰살뜰한 발이 되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첫날 지독했던 9시간 심야 버스의 악몽은 이동 수단에 대한 기준이 되었고, 장거리 운전에 대한 부담을 확실히 낮춰주었다. (뭐가 됐든 그것 보단 낫지)
지금 당장 죽는 게 아니라면 현재 상황은 앞으로 어떤 결과를 나을지 모른다. 가장 비극적이고 별로라고 여겨지는 최악의 순간이 나중에는 가장 좋은 명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고집을 내려놓고 순리에 따라 보겠다는 마음가짐과 어떤 상황에도 밝은 면을 보겠다는 의지인 것 같다. 앞으로 다가올 시련들에 마음을 움켜쥐기보다는 기꺼이 포기하는 내가 될 수 있길. 통수의 통수의 뒤통수의 연속이었던 안탈리아를 떠나며 덜덜거리는 은색 자동차 안에서 나는 조용히 두 손 모아 기원했다.
덧.
렌터카 업체 직원은 공기압 경고등에 대해 문의하자 어떤 버튼을 길게 눌러 경고등을 끄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ㅋㅋ 이후 주유소에서 선량한 카센터 사장님이 단돈 500원에 공기압을 체크해 주셨다. 그래도 경고등이 계속 들어와서 그냥 직원이 알려준 대로 경고등을 끄면서 다녔다. ㅎㅎ이것이 튀르키예의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