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이 사악했던, 인천-이스탄불-카파도키아(괴레메) 그 하루 여정.
가기 싫었다.
출발하기 전 날까지 내 캐리어는 비어 있었다. 대체 뭘 어떻게 가져가야 한단 말인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발이 묶였던 지난 3년. 나는 짐을 싸고 환전을 하고, 여행자 보험을 들고, 그 나라 휴대폰 유심을 사는 방법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막 퇴사를 한 그로기 상태의 나는 그런 것들을 다시 떠올리고 찾아보는 게 무지무지 귀찮았다. 그리고 뭔가 정부의 방역 지침이 변경되거나, 천재지변이 생겨 결국 이 여행이 무산될 것 같은 바보 같은 엉터리 직감이 있었다. 남편 상정에게는 유감이지만 하는 수 없지 않냐는 말을 건네야지. 내년에는 더 멋진 곳을 여행할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해야지. 라며 여행이 성사되지 못했을 때 행동 요령도 생각해두었다. 하지만 시계의 초침은 쉼 없이 움직였고, 한국은 귀국 전 코로나 검사 제도를 폐지했으며, 결국 출발일이 다가왔다. 역시 직감은 믿을게 못된다.
출발 전날은 다행히 추석 연휴였고, 상정은 MBTI '극J' 답게 꼼꼼하고 계획적으로 가져갈 물건을 체크하고 신속하게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난 느릿느릿 나무늘보처럼 옷가지와 물건을 챙겼지만 그 마저도 너무 피곤했다. 24인치 캐리어에 뭔가를 하나씩 넣을 때마다 과연 심약한 내가 끌고 다닐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생겼다. 나는 조금이라도 버거워 보이면 두 손에 물건을 들고 '이건 포기할까?'라고 외쳤고, 상정은 '이리 줘'라고 하며 자신의 28인치 캐리어에 넣었다. 이런 패턴은 수 차례 반복됐고 '이방-왜불러?' 만담과 같은 짐 싸기는 밤이 깊어서 끝이 났다. 그리고 출발 당일 새벽 다섯 시, 환갑이 넘은 부모님은 딸의 퇴사 여행을 위해 인천공항 셔틀을 자처하며 우리 집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과 부모님의 정성으로 나는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오전 9시 30분. 아시아나 이스탄불행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튀르키예 패키지여행 손님들은 여행사에서 나눠준 기내 용품 파우치 같은 것을 들고 좌석에 앉아 신나게 여행의 기대감을 나누고 있었다. 황금 똥손인 나는 사전 체크인에서 패키지 손님들 한가운데 좌석을 선택했고, 그 탓에 한 중년 부부는 양 옆이 아닌 앞뒤로 앉는 이별을 맛보았으며, 그 업보로 우리 뒷좌석에는 전생에 종달새가 아니었나 싶은 세 분의 여사님들을 맞이하게 됐다.
종달새 여사님들은 이스탄불로 가는 11시간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셨고, 나도 가끔은 끼고 싶었지만, 솔직히 정말 괴로웠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영화를 보거나 주무시겠지. 오랜만에 여행이라 즐거우셔서 그런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틀렸다.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것은 있었다. 여사님들은 끝이 없었고, 180이 넘는 키와 건장한 체구 덕분에 이코노미석 자체가 고문인 상정은 9시간을 참고 견디다, 결국 '선생님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겠습니까.'라는 정중 하지만 위협적인 부탁을 건넸다. 종달새 여사님들은 상정의 눈썹 사이가 약간 우그러져 있는 것을 보았는지 남은 두 시간은 소곤소곤 속삭이며 볼륨을 낮춰주셨다.
오후 5시, 무사히 이스탄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우리는 짐을 찾아 사비하 괵첸 공항으로 이동해 오후 7시 30분 카파도키아 괴레메로 가는 튀르키예 국내선 비행기를 탑승해야 한다. 이스탄불 국제공항에서 사비하 괵첸 공항까지 거리는 약 70km. (인천 국제공항에서 김포 국제공항으로 이동해 국내선을 타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두 시간 반 여유면 거뜬할 것이라는 예상은 정말 안일한 생각이었다.
3년 전 포르투갈 여행에서 남은 200유로를 리라로 환전하고 부쳤던 수화물을 기다리는데, 조짐이 이상했다. 왜 수화물 벨트가 조용하지? 도착한 지 30분이 다 돼가는데, 단 하나의 수화물도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30분을 더 기다리자 거북이처럼 승객들의 수화물이 하나씩 하나씩 등장했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삼십 분. 우리의 캐리어는 언제나 오는 거지? 10분을 더 기다리니 상정의 짐 가방이 등장했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이십 분. 20분 후, 꾸역꾸역 나의 회색 캐리어가 나타났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이미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글렀다. 안내 카운터에 재빨리 물어보고, 황급히 공항 앞 택시 정류장으로 뛰어갔으나 수화물처럼 택시도 느릿느릿 한 대씩 도착하고 있었다. 아... 난 안 될 운명이구나. 포기하고 싶었다. 그냥 비행기를 놓치고 이스탄불에서 하루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운명과 같이 택시 기사 아저씨를 만났다.
기사님에게 우리의 사정을 손짓 발짓 구글 통역기로 설명하고, 최대한 빨리 가면 얼마나 걸릴지 묻자, 기사님은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도 되는지를 물어보시고는 내비게이션에 가장 빠른 길을 조회했다. 50 min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못 탈 거 같은데... 가지 말까?라고 말하려는데 상정이 '일단 타자!'라고 하며 짐을 번쩍 들어 트렁크에 싣었다. 그래 가보자! 못 타면 거기서 생각해보지 뭐. 택시 기사님은 우리의 표정을 읽으신 듯 최선을 다해 운전대를 휘두르셨다. 기적이 일어난 듯 예상 소요시간 50 min은 갑자기 45 min, 39 min으로 줄었고., 우리가 탄 택시는 40분 만에 사비하괵첸 공항 출발 플랫폼 앞에 도착했다. 감사한 마음에 기사님에게 거스름 돈도 받지 않고 '킵더 체인지. 땡큐!'를 외치며, 공항 출입구로 쏜살 같이 들어갔다.
튀르키예는 공항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짐 검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또 초조한 시간을 견뎌야 했고, 가져온 짐의 무게가 국내선 수화물 무게를 초과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추가 무게를 구매했지만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더 결제를 해야 했다. 지난한 약 15분 간의 과정을 거쳐, 나와 상정은 마침내 카이세리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엄청 난 프로세스를 거쳐 좁고 불편한 국내선 저가 항공 좌석에 앉은 그때, 번개를 맞은 듯 눈이 번쩍 떠지면서 머리가 맑아졌다. 맞아 그래. 이것이 여행이었다. 늘 꿈꾸던 도전이고 모험이었다. 뜨거운 피가 흐르면서 뛰고 있는 심장이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약물 중독자처럼 권태감 포기, 무력감 그리고 실패에 젖어 있었구나. 여행이 귀찮고 싫었던 것은 마치 중독자의 금단 현상 같은 것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가 대체 몇 번이나 포기하려고 했는지 헤아려보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고, 완벽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았지만 뭐 어쨌든 해냈다. 나와 같은 상황이지만 포기나 실패, 그 어떤 부정의 말도 꺼내지 않았던 상정의 얼굴을 슬쩍 바라봤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뭐가 됐든 우리는 카파도키아, 아름다운 말들의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이세리 공항에 도착해서도 픽업해 호텔까지 태워다 주실 기사님을 바로 찾지 못해 또다시 혼란을 겪었지만, 이제 괜찮았다. 이제야 비로소 역경을 맞설 준비가 되었다. 가까스로 기사님을 만나 덜컹거리는 벤을 타고, 포장이 미흡한 도로를 한 시간 반 가량 달려 드디어 미리 예약한 올리비아 케이브 호텔 앞에 도착했다. 가족이 운영하는 깨끗한 호텔이었고 직원들은 갓 도착한 우리에게 홍차를 권하며 마치 멀리 외국에서 살다 오랜만에 귀국한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카파도키아 지역, 화산 활동에서 비롯된 응회암 속을 파내어 만들어진 동굴 마을 괴레메는 어둠 속에서 찬란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마침내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