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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chic Jun 20. 2023

십. 지독하게 맛있었던 이스탄불.

이스탄불. 미각이 기억하는 맛의 천국.


이스탄불로 가기 위해 안탈리아부터 셀축까지 장장 2주 간 여정을 함께했던 렌터카를 이즈미르 공항에 반납했다.


이스탄불은 그야말로 대도시. 이즈미르주부터 이스탄불까지는 운전시간이 너무 길고, 자동차를 가져간다고 해도 이스탄불의 복잡한 시내 운전과 주차 전쟁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이즈미르 공항에 차를 반납하고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자꾸 타이어 공기압 체크등이 들어오고, 소음이 커서 운전 중에는 서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오래된 소형차였지만 덕분에 튀르키예 곳곳을 알차게 누빌 수 있었다. 정들었던 차량과의 마지막 순간이라 아쉬운 마음도 컸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하고 후련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작은 사고나 어려움이 없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사했다.


터미널로 들어가 국내선 탑승에 체크인하고 라운지에서 이스탄불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사실 상정과 나는 잔잔한 숙취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셀축에서의 마지막 날 토요시장을 보고 난 뒤 할 일이 없던 우리는 충동적으로 버스 터미널에서 인근 휴양지인 쿠샤다시로 가는 돌무쉬를 타고  바닷가에 있는 주점에서 맥주와 시샤를 마음껏 즐겼다. 저렴한 물가를 자랑하는 튀르키예에서 맥주 값으로 우리 돈 10만 원 넘게 써버렸으니 얼마나 마셔댄 걸까. 얼큰해져 버린 우리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달콤한 시럽으로 꽉꽉 찬 바클라바를 각자 4개씩 먹으면서 튀르키예식 해장을 시도하고 잠을 청했다. 그 덕분에 다음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음주의 여파는 남아 두개골 속을 잔잔히 휘젓고 다니는 중이었다.  이즈미르 공항 라운지에서 뜨끈한 토마토 수프를 발견한 상정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올랐고, 나와 상정은 토마토 수프를 한 대접씩 마시면서 남아 있는 두통을 잠재웠다. 그리고 우리 역시 비행기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멈춰 멈추라고
혼미한 정신. 아이스크림과 토마토 스프로 정신에 얼차려 주는 중.

이스탄불 사비하귁첸 공항에 도착한 후, 공항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는 탁심 광장으로 향했다. 탁심 광장에 내리자 다른 지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대도시의 혼잡함과 인파에 압도되어 버렸다. 탁심광장은 우리나라로 따지면 명동과 같은 곳. 수많은 인파와 함께 심각한 교통난을 자랑한다. 거리에는 옷가게, 케밥 식당, 터키쉬딜라이트를 파는 카페, 화장품 가게, 시미트를 파는 수레 등이 들어차 있다. 나와 상정은 커다란 캐리어를 짊어지고 복잡한 탁심 광장을 천천히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고, 탁심광장 이슬람 사원에서는 기도 시간을 알리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파른 경사를 오르내리며, 어둑어둑해져서야 미리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드디어 마지막 여정지인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 중간에 위치한 이스탄불은 그야말로 문화유산의 총집합지. 우리는 총 2일 정도 이스탄불에 머물며 첫날은 자유롭게 일정을 보내고 둘째 날은 워킹 투어를 받으며 이스탄불을 탐방할 계획을 세웠다.

인민군 복장으로 도착한 이스탄불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달릴 채비를 했다. 운동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이유는 천상의 맛이라고 알려진 카이막을 먹기 위해서다. 백종원이 TV에서 소개한 탓에 유명해진 카이막은 원래 터키 아침 식사 카흐발트에 등장하는 메뉴 중 하나. 따라서 아침 식사를 판매하는 식당에서 일찍부터 카이막을 맛볼 수 있다. 상정과 나는 아침식사 겸 이스탄불의 거리를 ’뛰어서‘ 카이막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숙소부터 카이막 식당까지는 대략 4km. 평소 5km를 뛰는 우리에게 거리도 제법 괜찮다. 달릴 준비를 마친 우리는 힘차게 거리로 향했다.


탁심 광장을 지나 갈라타 다리를 건너 그랜드 바자르를 가로질렀다. 영업 준비를 하고 있던 그랜드 바자르의 사장님들은 쫄쫄이 바지를 입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오르막길을 내달리는 우리를 보자 엄지 손가락을 척 내밀며 응원을 건네주었다. 지도를 확인하며 정신없이 약 30분 정도를 달려 목적지인 카이막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앞에는 백종원의 싸인과 촬영 현장 사진이 붙어져 있었다. 우리는 카이막 두 개와 튀르키예 커피를 시켰다. 땀 흘리며 달려온 탓인지 갓 구운 바게트 빵에 찍어먹는 카이막은 정말 꿀맛이었다. 순식간에 접시를 비우고 다시 한번 차이 두 잔과 카이막 두 개를 시켰다. 두 번째 접시 역시 핵꿀맛! 물소 젖으로 만든 카이막은 부드럽고 신선한 꿀의 달콤함은 러닝의 피곤함을 잊게 만들어 주었다. 배를 두둑이 채운 우리는 바닷가 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숙소가 있는 탁심 광장으로 향했다. 바닷가 옆 평평하고 완만한 길을 걸으며 ‘아, 이쪽으로 달려올걸...’이라는 후회를 잠시 했지만 오르막길 덕분에 카이막을 더 맛있게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내뱉은 후회를 바로 거두었다.

오후에는 토카피 궁전을 방문했다. 투어를 받는 화요일은 궁이 문을 닫는 날이기 때문에 미리 궁을 봐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타북 필라프 맛집을 들렸다. 대학가 근처에 위치한 식당은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냄새로 가득했다. 타북은 닭, 필라프는 밥. 즉 타북 필라프는 닭고기 밥을 뜻한다. 삶은 병아리 콩이 얹어진 타북 필라프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었다. 닭의 진한 풍미를 품은 폭신한 쌀밥! 나는 매운 고추를 얹어가며 쌀 한톨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토카피 궁전은 이미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궁의 여성들이 살았던 하렘을 포함해 화려하고 아름다운 오스만 제국 시대의 궁을 구경했다. 사실, 무엇을 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쏟아지는 인파에다가 갑자기 상정에게 도진 비염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입장료가 아까워 좀 버티다가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재채기와 콧물로 괴로워하는 남편을 이끌며 억지로 곳곳을 본다고 해도 좋은 기억으로 남지는 않을 것 같고, 이런 상황에서는 숙소로 돌아가 좀 쉬고 라면이나 끓여 먹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정은 숙소에서 약을 먹고 휴식을 취하자 곧 괜찮아졌고, 우리는 라면을 끓여 먹고 숙소 주변에 있는 가게에서 수박과 탄투니를 야식으로 사다 먹었다. 탄투니는 넓적한 철판에 고기를 볶아 크레페에 싸 먹는 음식인데 고기를 볶을 때 나는 소리를 본떠 ‘탄투니’라고 한다. 볶은 고기의 육즙과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두 개 사 먹을걸. 아직도 후회가 되는 부분이다.

토카피 궁전 하나보고
타북 필라프랑
라면이랑
탄투니 먹음

이스탄불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하루. 우리는 워킹 투어를 받았다. 아침 일찍 약속장소에 나와 수레에서 파는 시미트를 사 먹었다. 시미트는 터키식 빵. 달콤하지 않고 고소하고 단단한 질감이 일품이다. 워킹투어 가이드님은 알뜰살뜰 게스트를 챙기며 아야 소피아, 지하수 보관소, 전차 경기장, 술레이마니예 자미 등을 안내해 주셨다. 여기서 하이라이트는 점심으로 먹었던 교프테. 교프테는 우리의 떡갈비와 비슷한 음식이다. 가이드님은 아야소피아 근처의 100년 전통을 가진 교프테집이 있다고 알려주셨고, 그곳의 교프테는 잡내 하나 없이 너무나 맛있었다. 사실 점심시간 직전 트램을 타야 하는 시점에 상정이 본인의 교통카드를 홀라당 잃어버려서 조금 화가 났었는데, 맛있는 교프테를 먹자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맛있는 음식은 마음을 넓혀준다. 누군가 자신의 교통카드를 소매치기해 간 것 같다고 얘기하는 상정을 귀엽게 봐주기로 했다. (말도 안됨)

전차 경기장에 있던 로마에서온 탑
100년 전통 교프테 짱! 윤기 보세요.

저녁은 함께 투어를 받은 분들의 추천으로 생선 케밥을 먹었다. 불에 구운 생선의 향이 일품이었다. 매끼 이렇게 맛있는 것들을 먹어도 되는지. 혀가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이어, 150년 전통의 바클라바 가게로 향했다. ‘카라쿄이 귤루올루’ 우리는 이스탄불에 오기 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곳의 장인정신에 대해 공부한 바 있었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가게에서 먹은 바클라바의 맛은 ‘크게 다를 것 없네?’였는데, 진가는 한국에 돌아와서 발휘되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지인에게 선물할 바클라바들을 잔뜩 사 왔는데, 선물을 받은 지인들에 의하면 한 달을 냉장고에 두었지만 바삭함이 유지되었다고 한다. 역시 내공은 어딘가에서는 발휘된다.

불향 일품 생선케밥
카라쿄이 귤루올루의 바클라바. 우유에 말아먹는 바클라바는 포장이 불가하니 꼭 현장에서 드시기를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날 아침. 나와 상정은 트램을 타고 다시 한번 카이막을 먹으러 갔다. 지금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튀르키예의 맛. 그렇게 우리는 이스탄불의 마지막을 천상의 맛 카이막으로 장식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오스만제국의 문화와 유적을 보겠다며 시작한 이스탄불에서의 여행은 그렇게 강렬한 미각으로 남게 되었다. 지독하게 맛있었던 이스탄불. 그 맛과 멋 모두 변치 말기를.

덧.

식당을 소개하겠습니다!

시샤를 하면서 술을 진탕 마셨던 쿠샤다시의 바: LEILA CAFE KUSADASI - 해 질 녘 일몰이 일품이다.

카이막 식당: Borisin Yeri - 짠내 투어에 나왔던 그 집! 아침 일찍 가는 것을 권한다.

닭고기 밥 타북 필라프: Meshur Unkapani Pilavcisi

볶음 고기 말이 탄투니: Suat Usta Mersin Tantuni

100년 전통 떡갈비 교프테: Tarihi Sultanahmet Koftecisi Selim Usta

구운 생선케밥: Super Mario Emin Usta

150년 전통 바클라바: Karakoy Guilluog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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