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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chic Jun 22. 2023

십일. 왜 튀르키예였는지 아직도 모르지만

19일의 경험으로 90일을 채웠다.

9개월이 흘렀다.

2022년 9월, 직항이 있길래 티켓을 끊은 뒤 시작된 약 19일간의 튀르키예 여행이 끝난 지 9개월이 흘렀다. 그 말인즉슨, 총 9개월 만에서야 여행기를 마무리했다는 것. 게을러도 너무 게을렀다. 나는 총 19일 간 튀르키예의 카파도키아- 안탈리아 - 카쉬 - 아프로디시아스 - 파묵칼레 - 쉬린제 - 셀축 - 이스탄불 총 8개 도시를 탐방했다. 별생각 없이 무기력하게 시작한 여행은 생각보다 너무나 좋았다. 아직도 나와 남편은 뭔가에 지칠 때면 이때의 기록들을 꺼내보고 다시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다시 한번 여행의 힘을 느꼈다.


다녀온 뒤에도 유라시아 지역의 역사나 문화, 아나톨리아 반도의 지질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다. 하지만 올초 튀르키예 지진피해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소액이긴 하지만 선뜻 얼마의 돈을 기부했다. 한국에서 우연히 터키 식당이나 베이커리를 발견하면 발길을 멈추고 메뉴판을 살피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 집 근처 번화가에 있는 시샤바에 들러 물담배를 즐기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이 정도가 튀르키예 여행 후 바뀐 것들인 것 같다. 사소한 것들이지만 이전까지 내 인생에 없던 것들이었다. 이렇게 작고 새로운 것들이 내 속에서 자라난 것이 감사하다. 튀르키예에 가지 않았으면 하나도 몰랐을 거다.


여행을 다녀온 뒤, 나는 또 다른 스타트업에서 일을 했고, 올해 3월 또다시 다니던 회사가 망했다. 1년 이내에 회사가 두 번이나 망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첫 번째 경험은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두 번째 경험은 곤장으로 내려쳐진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신이 나를 버린 건 아닐까? 모든 걸 던져버리고 다시 우주로 돌아가고 싶을 때마다 나는 아이패드를 열고 튀르키예 여행기를 써 내려갔다. 사진을 정리하고 기억을 더듬어 글을 작성하면 괴로움을 조금은 잠재울 수 있었다. 19일간의 경험으로 90일을 채우며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튀르키예에서의 시간은 다시 한번 나를 도와주었다.


늦게 쓴 여행기라 그런지 다시 읽어보면 좀 밋밋하다. 매일 일기를 썼다면 좀 더 생동감 있는 글이 되었을 텐데, 그리고 덜 귀찮았을 텐데. 그렇지만 모든 것들이 조금은 편평해진 상태에서 쓴 여행기이므로 쭉정이는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남을 웃기거나 재밌게 만들려고 쓴 글이 아닌 것도 마음에 든다. 먼 훗날 나와 상정이 함께 꺼내 볼 수 있는 기록을 만들었다는 것에 만족한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기록을 이어갔다는 것에 스스로를 칭찬한다. 나는 운은 없지만 근성은 있는 것 같다. 9개월이나 늦게 밀린 일기를 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의 유일한 독자 상정은 여행기를 읽으며 늘 자신이 실제보다 좋은 사람으로 그려져 부끄럽다고 했다. 하지만 상정은 글로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정말 좋은 사람이다. 어떻게 이렇게 멋진 인생의 파트너를 만났는지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여기에 운을 다 써서 자꾸 회사가 망하는지도 모르겠다. ㅎㅎ 그리고 글을 업로드할 때마다 오셔서 하트를 선물해 주시는 감사한 분들이 있었다. 이 분들의 하트가 멈추고 싶어하는 나를 자꾸 생각하게 만들었다. 정말 정말 감사하다. 혹시 튀르키예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이었다면 내 부족한 글조각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길 기원해 본다.


나는 이제 그만 망하고 싶다. 그래서 조금 쉬는 중이다. 운은 없지만 근성은 있기 때문에 조금만 쉬고 다시 돌아가서 일자리를 찾아보려고 한다.

근성 좋은 기획자를 찾으시나요? 연락주세요! ㅋㅋㅋ 그치만 올해는 튀르키예에서 배워 온 좋은 걸 써먹어보려고 한다.

신의 뜻대로! 인샬라 마샬라!
튀르키예 마지막 날. 이제 집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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