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1년 정도 할머니를 케어했고 그 사이 취업 시도를 열심히 했지만 실패했다. 계속 미취업자로 지내기가 두렵기도 했고 젊은 시절 다른 학문을 조금 더 배워 내 인생길을 다지고자 간호학과로 재입학하게 되었다. 간호대학을 본가인 부산에서 다니게 되어 예전처럼 삼촌 3명이서 한 달씩 돌아가며 할머니를 보살폈다. 나는 입학하기 전까지 할머니를 돌보기로 하고 간간히 친구들을 만났다. 간호대학을 다니느라 본가에 내려가고서부터 4개월 사이 치매약이 반 알 더 늘었고 알약이 느는 만큼 치매 증상이 심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두드러져 보이는 증상은 누가 누군지 헷갈려하신다는 것이었다. 할머니 집과 가까이 사는 삼촌 3명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하면서도 엄마의 존재는 잊어버리기 일쑤였고 나는 누구의 자식인지 헷갈려했다.
나 : 할머니 나 누구 딸이게?
할머니 : 몰라. 너 셋째(셋째 삼촌) 딸이냐?
나 : 아니요. 잘 생각해 보세요. 할머니. 나 삼촌 딸 아니에요.
할머니 : 그럼, 첫째(첫째 삼촌) 딸이냐?
나 : 아니요. 나 부산에서 왔는데, 누구 딸이 게요?
할머니 : 그럼 막내(넷째 삼촌) 딸이냐?
나 : 할머니! 막내 삼촌은 아들만 둘이에요!
할머니 : 그럼 너는 누구 딸이냐? 아무 자식도 아니라면 누구 딸이야?
나 : 할머니 나 부산에 있는 할머니 딸 손녀예요!
그리고 할머니의 요실금도 점점 더 심해져갔다. 채매의 특성 중 하나인 '무기력함'이 요실금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소변을 보고 싶어도 일어나는 게 귀찮아서 참고 또 참다가 자제력을 잃고 완전히 싸버리게 되고, 이로써 빨래와 청소할 거리가 더 많아졌다. 삼촌들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할머니를 목욕시키기 어려워하셨고 외숙모 없이 할머니 케어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혼자 하게 내버려 두면 소변 실수하신 팬티와 바지를 그대로 널어 말리셨고 다 마르고 나서는 냄새가 나도 인지하시지 못하고 그냥 입으셨다.
삼촌들께서 힘에 부쳐 하던 중 나중을 대비하여 대기명단을 걸어 놓은 요양원에서 연락이 왔다. 삼촌들은 할머니를 모시는 게 힘들긴 하지만 갑자기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려니 마음이 좋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요양원에서는 입소 결정 기간을 이틀밖에 주지 않았고 이에 가족들은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갈팡질팡하여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요양원이라는 곳에 언젠가 가게 될 곳이란 걸 알면서도 '그 언젠가'가 꽤 먼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연락이 와서 당장 결정을 내리라고 하니 슬픈 것은 당연하고 당황했다. 영영 면회가 안 되는 곳은 아니었지만 가족끼리 요양원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시점에서 할머니를 입소시키려니 더더욱 갑작스러운 마음이셨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할머니를 모시는 것을 힘들어한다면 그리고 어차피 나중에 가게 될 곳이라면 조금 앞당겨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의견이 모아졌다. 아직 기억을 조금 하시는 할머니를 보며 요양원의 좋은 기억을 심어주면 나중에 치매가 더 심해져도 좋은 기억으로 살아가실 거란 기대도 했다. 요양원 시설이 좋다고 소문이 났기에 다음번으로 미루면 제일 마지막 순번으로 미뤄져 얼마나 기다릴지 몰라 입소를 결정했다. 그렇게 할머니는 느닷없이 요양원에 입소하기로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