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꾸가 없었다. 계속되는 말다툼과 신경전으로 화가 났다. 하루 종일 청소를 하고 잠시 외출했을 뿐인데 괜히 늦게 왔다고 투정 부리는 것 같아 더욱 화가 났다.
나 : 누룽지?
할머니 : 빨리 아무거나 끓여!
말없이 누룽지를 끓이기 시작했다. 며칠 전 복지관에서 과식을 했는지 잠을 못 자고 거실을 왔다 갔다 하시다 새벽에 날 깨우던 일이 생각나 누룽지를 얼마큼 드려야 할지 고민했다. 손끝을 이용해 냄비에 누룽지를 떨어뜨렸다. 작은 양의 누룽지가 냄비 속에 ‘딸랑’하며 소리를 냈다.
나 : (너무 작나?)
다시 한번 누룽지를 손끝으로 떨어뜨리고 물을 넣어 밥이 불을 때까지 냄비 안을 휘휘 저었다.
누룽지가 끓는 동안 나는 김치를 꺼내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침에 넣어둔 두유 한 팩이 없었다. 내가 늦게 들어와 두유를 꺼내 드신 듯했다. 분리수거를 철두철미하게 하는 아파트 때문에 두유팩을 찾아야만 했는데 어디에도 두유팩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었는데 두유팩이 보였다.
나 : 할머니! 이리로 와 보세요!
할머니 : 왜!
나 : 쓰레기 여기다가 버리면 돼요, 안 돼요?
할머니 : 내가 내일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갈 때 같이 버리려고 했어.
아파트는 분리수거 지정 요일이 있었기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와 우유팩을 같은 날 처리할 수 없다. 그리고 기억력이 감퇴한 후 쓰레기장 아무 곳에다 쓰레기를 버리는 할머니의 모습을 알아버렸기에 분리수거를 할머니가 하지 못하게 해왔다.
나 : 음식물 쓰레기 버릴 때 맘대로 쓰레기 못 버려요. 빨리 분리수거하는 봉지에 갔다 놔요.
할머니 : 야, 너 선생질 잘한다?
말과 동시에 음식물 쓰레기통에 박혀있던 두유팩을 바닥을 향해 던지곤 방문을 쾅 닫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기름때며 참외씨며 덕지덕지 붙어있던 두유팩이 바닥으로 나뒹굴며 찌꺼기가 온 사방으로 다 튀는 것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오늘 아침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청소한 몫도 나의 분노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 : 미쳤지.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지.
혼잣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분노에 내가 미쳐버릴까 봐 계속 중얼거리며 바닥을 닦았다. 그 사이 누룽지는 다 끓어 밥그릇에 누룽지를 부었다. 누룽지 반 공기와 김치를 식탁에 놔두고 할머니 방으로 갔다. 평소 더위를 많이 타 겨울에도 러닝만 입고 주무시는 할머니가 이불을 목까지 뒤집어쓰고 계셨다. 꼭 엄마한테 사탕 달라고 했다가 안 주니까 삐진 어린아이의 표정이었다.
나 : 할머니 누룽지 다 끓였어요. 나와서 드세요.
애써 침착하게 할머니를 불렀다. 하지만 이불만 더 여민 채 대꾸를 안 하셨다.
나 : 할머니 누룽지 다 끓였어요.
들은척하지 않은 채 평화방송만 보고 계셨다. 삭히지 못한 분노가 다시 치밀었다. 결국 화를 내었다.
나 : 할머니! 누룽지!
방문을 탁 치며 큰 소리로 불렀다. 그제야 눈으로 힐끔 쳐다보는 할머니를 보자 계속 대화를 하면 싸울 것 같아 내 방으로 들어갔다.
숟가락을 낚아채 밥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할머니 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엄마가 설거지를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도 내가 하는 행동을 다 알아채는 걸 보며 신기해했는데, 요즘 내가 할머니의 행동을 보지 않고도 무엇을 하시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누룽지를 다 드시고 꼼짝 않고 누워계시는 할머니를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시간이 지난 후 자연스럽게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시자 '묵주기도 하고 자라'며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내 방문을 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