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1. 추석 연휴가 지난 어느 평일 오후 / 건순이와 정형외과
의사 : “뼈는 이상이 없고요. 손목 인대가 조금 늘어났네요. 아이가 넘어지거나 다친 적 있나요? "
홍디 : “아니오. 아이 말로는 오랜 시간 짚고 있었다고 해요. "
의사 : “그렇다고 인대가 늘어났을까요. 보호대를 하고 일주일 후에 경과를 보기로 하죠. ”
건순 : ”엄마, 보호대가 뭐야? "
보호대라는 말에 놀란 토끼눈을 한 모녀는 진료실 옆의 처치실로 안내를 받았다.
간호사 : “아이 손목이 가늘어서 맞을지 모르겠어요. 이게 가장 작은 사이즈긴 하거든요. "
S사이즈의 손목 보호대를 바짝 조여 건순이 왼손에 장착을 한다.
건순이의 눈꼬리, 입꼬리는 슬슬 하늘을 향해 헤벌죽 거리더니, 수납을 기다리는 동안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흐물 웃음보가 터졌다. 그렇게나 좋을고. 그리 심하게 아프지 않아 그런가. 왼손이라 다행인가. 끼웠다 뺐다 하는 보호대라 좋은가. 글쎄다. 그저 처음이라 특별한 모양이다.
#2. 다음날 아침 등굣길
교문 앞에서 건순이 친구를 만났다.
“건순아, 너 팔 왜 그래? "
“나 인대가 늘어났대. ”
“아프겠다. 그런데 나 이거 해봐도 돼? ”
“응. 학교에서 손 씻을 때는 잠깐 뺄 수 있어. ”
“그럼 이따가 화장실 같이 가자. "
“근데 너 병원 가서 피 뽑아 봤어? 엑스레이는 찍어봤어? “
“나 엑스레이 사진 찍어봤어! ”
“나는 초음파도 해봤어! ”
“우아. 정말? ”
그래. 너희들 참 잘 났다. 보호대 그것이 뭐길래. 친구들 너도나도 따라나서서 건순이가 손 씻는 동안 보호대를 서로 들어주고, 순서대로 손에 끼워도 보고 하는 모양이다.
딸아이의 첫 보호대.
세상을 새롭게 막 접하는 아이들은 어쩌면 어른보다 ‘처음’에 능숙할지 모른다. 걱정거리 많은 애미와는 달리 아이는 새로운 경험과 설렘 그 자체를 진솔하게 받아들인다.
#3. 수채화디자인 클래스
올여름 원데이클래스를 처음 시작하고 가을 클래스를 진행 중이다. 두 번째 시즌인 만큼 처음보다는 덜어낸 긴장감의 자리에 감사의 마음이 파레트를 채운다. 새하얀 새 파레트에 물감을 짜던 그을린 피부도 이제는 한 톤 밝아졌다. 수많은 준비물을 빠짐없이 챙기는 손놀림은 점차 수월해지고 있다. 찾아와 주시는 고객분들과 이어지는 인연은 소중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익숙해져 가는 가을, 깊어가는 오늘 안에서도 늘 ‘처음’은 함께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세상에는 안 해본 것투성이다. 20년 넘는 직장생활의 문을 닫고 백수의 길을 두리번거리는 것도 처음이었으나, 이내 빈둥대기도 능청스러워지더라. 퇴사 후 수채화를 처음 배우면서 위로받았던 마음은 2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한결같다. 매주 그림을 배우러 가는 길은 끌리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으니.
해볼까 말까 망설이는 게 있으신가. 후회의 무게는 대게 해본 것보다 해보지 못 한쪽으로 기운다. 시도하려는 의지와 설렘이 중하다. 이 사실을 알고도 모르는 척 시선만 굴리려는 분. 저기요. 궁디 단디 떼고 행하세요홍홍.
새로운 ‘처음’을 앞두고 있다. 인스타를 통해 홍디의 원데이클래스를 눈여겨보시던 선생님 한 분의 소개로 색다른 환경에서 수업을 하게 되었다. 처음인데 잘할 수 있을까, 건만이, 건순이 케어는 어떡하지. 머릿속은 걱정의 빛깔로 시커멓게 물들지만, 물기를 톡톡 두드려 빼본다.
행한 후에는 실패조차 깨달음이 되고, 행하지 못한 그 자체가 후회로 남을 것이니. 용기 내었던 ’처음‘이 있었기에 연기처럼 뿌연 길을 호호 불며 다져나갈 수 있는 게 아닌가.
수채화의 매력을 함께 나누고자 시도했던 첫 클래스를 잊을 수 없다. 경험은 쌓여가지만 매 번 처음 만나는 고객들을 상상하며 설레는 걱정을 한다. 고객분들도 붓질이 처음이라 낯설겠지.
‘처음’이라는 것. 그 유일한 기회를 함께 하기 위해 나를 찾아준 분들. 우리 아이들과 홍디의 고객들이다. 감사랑해요홍.
처음을 기억한다
remember
결국 삶은 사람이다
+덧마디
왼손에 보호대를 해서 오른쪽 한 손으로 뜀틀을 넘었다나 뭐라나. 새끼손가락 퉁퉁 부어올라 독서장을 못 쓰겠다고라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