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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디 Nov 22. 2023

워킹맘의 모유수유

지하철역 통곡녀

#1. 가을비. 저녁. 7호선 노원역 개찰구 앞.


흐엉 흐어엉 어엉엉. 작고 마른 젊은 여자가 통곡을 하고 있다. 무슨 사연일까. 손에는 축 쳐진 쇼핑백 하나와 젖은 우산을 고이 말아 들고 있다. 띡띡. 경쾌한 소리를 내며 퇴근길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오던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본다. 여자는 그네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세상을 다 잃은 듯 주저앉아 하염없이 운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이잉. 그녀의 전화기에 모르는 번호가 요동쳤다.


“흐흐엉. 여보세요”

“홍디씨 되세요?”

“네네!!!! 저예요. 저 맞아요. 흐흑으응흥”

배낭 잃어버리셨나요? 제가 가지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죄송하지만 연락처를 찾느라 가방을 조금 뒤졌어요. “

“흐엉 흑흑으흥엉. 감사해요 흐흐흑어엉”

“아이고, 그만 울어요. 지금 어디세요? 여기는 7호선 끝 차고지예요. 장암행을 타시고 지하철 맨 앞칸으로 내려서 그 자리에 계시면 제가 나갈게요. 업무를 하고 있어서 조금 기다려주셔야 할 수도 있으니 벤치에 앉아계세요. 조심조심 오세요. “


친절하고 침착하게 다독여주는 남자의 음성을 들으며 여자는 서서히 진정하고 몸을 일으켰다.





#2. 장암역 실외 플랫폼 1-1 문 앞.


비가 그치고 날이 춥다. 여자는 눈물을 그쳤고 으슬하게 움츠리고 서 있다. 7호선 종점 차고지는 너르고 어둑한 미지의 세계 같다. 낯선 곳, 물어볼 사람 아무도 없는 텅 빈 승강장. 컴컴한 고요 속의 기다림을 위로하듯 저 멀리에서 희미한 불빛이 다가온다.


여자는 투명한 지하철 안전문에 코가 닿을 듯 다가가 침을 꿀꺽했다. 자전거를 탄 남자가 유유히 발을 구르며 가까워온다. 등에는 그녀의 큰 배낭을 둘러매고 있다. 가방을 확인한 여자는 꼬부렸던 어깨에 힘을 놓으며, 선명해지는 불빛을 한시도 놓치지 않는다. 남자는 플랫폼 아래 미지의 공간에 자전거를 주차하고 탕탕탕 계단을 올라왔다. <외부인 출입금지> 경고가 시뻘겋게 가득한 문을 열고, 그는 여자의 현실로 발을 들였다. 다부진 올인원(all in one)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여자에게 큼직한 빈티지 백팩(backpack)을 건넨다.


“이 가방 주인이세요? 안에 도시락 같은 게 있더라고요. 연락처를 찾으려고 가방을 열고 조금 뒤졌어요. 물건들 다 있나 살펴보세요.”

도시락이라는 말에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생님, 정말 정말 감사해요. 이거 도시락 맞네요. 맞아요.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




#3. 택시 안. 2시간 이상 늦어진 귀가 시간.


“여보, 이제 집으로 가는 택시 탔어요. 건만이 어때요?”

“건만이 안고 있으니 울지 않아. 여보는 괜찮아? “

”괜찮아. 참을 만 해. 조금만 나 기다려 줘. “

“우리 잘 기다리고 있으니, 여보 조심히 와”


신랑과 통화를 마친 여자는 가방을 찾아준 남자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냈다.


여자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퉁퉁 불어찬 가슴이 아픈 줄도 모르고 건만이에게 달려갔다. 두 시간 넘게 저녁쭈쭈를 기다린 건만이는 엄마를(어쩌면 엄마 쭈쭈를) 보자마자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젖이 차올라서 돌덩이 같아진 애미의 가슴을 부여잡고 꿀꺽거리는 새끼를 바라보며 그녀는 꺼이꺼이 목청껏 또 울었다.




지하철 통곡녀는 9년 전의 나였다. 퇴근길 열차에서 자리가 나자 안도하며 앉았던 날. 머리 위 선반에 배낭을 올려두고 깜빡 졸다가 놀라서 뛰쳐나온 여자. 손에 든 쇼핑백과 우산이 충분히 묵직해서 가방도 들려있을 거라 착각한 그녀. 미련하게도 나는


완모하는 워킹맘이었다.

일하는 엄마로 유축해서 완모(완전모유수유:분유를 섞어 먹이지 않고 순전히 모유로만 수유를 함)하던 그녀는 작고 마를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건만이가 먹을 ‘모유도시락’을 생산해서 배달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니까. 우습지만 젖 짜러 출근하던 그 시절. 열탕소독한 유축도구와 아이스팩을 한가득 배낭에 짊어지고 엄마표 다이어트를 했다.


업무 시간 중 짬을 내어 하루 두 번 지이잉 지이잉 유축을 했다. 샘플실 행거 사이에 숨기도 하고 회의실에 우산을 펴기도 했다. 어떤 날은 남자 직원이 문을 열었다가 “어이쿠 죄송합니다” 하기도 했지. 물론 뒤돌아 가리고 있었다만 뭔들 봤어도 상관무.

후에는 양쪽 동시 유축의 장인이 되어서는, 쭉쭉 짜내면서 PT자료를 펴고 발표연습도 했다. 디자인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수첩에 스케치도 했으니 이제와 생각하면 당시 유축계의 달인.


신기한 이야기 하나 해볼까. 어떤 날은 젖이 잘 안 나오기도 했다. 어떤 게 무언고 하면,  밤중수유를 하고 잠을 다시 못 잤거나, 국물을 덜 먹었거나, 스트레스를 받았던 경우 들이 대표적이다. 가슴은 풍만해졌는데 젖이 나오질 않아, ‘아, 이럴 때가 아닌데‘ 시간은 촉박하고 불안지수가 올라간다.


잠시 숨을 고르고 유축시간을 체크하던 어플을 제친다. 건만이 사진영상을 보며 실실거리거나 시터이모님께 전화해서 “엄마야” 옹알옹알 소리를 들으면 막혔던 젖이 핑그르르 쭉쭉 쏟아진다. 징글징글한 인체의 신비다. 손주 보는 할미가 젖이 돌았다는 이야기도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하지.


워킹맘 완모 일등공신 각시밀유축기. 갑자기 유축기가 고장나서 젖이 막 불고있던 엄마께 당근 판매 완료.




#4. 또 비. 다음날아침. 출근하는 지하철 안.


복작복작 출근길 자리가 나질 않는다. 가방이 아무리 무거워도 선반에는 올리지 않으리. 어제 극적으로 내품에 돌아온 금쪽같은 배낭을 두 다리 사이에 끼워놓고 서있다. 


어느새 7호선 지하철은 컴컴한 터널을 달리다 뚝섬유원지에서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비 오는 날에도 창밖은 눈이 부시게 밝아 울컥한다. 암흑 속에서 빛을 밝히며 다가오던 자전거남의 모습이 떠오르며 복받친다.  



나는 과연 모유수유에 집착했던 걸까. 모유를 먹여야만 아이가 건강하고 애미가 사랑하는 거 아니지 않은가. 그저 넘들 얘기 아니 듣고 내 새끼에게 집중하다 보니 어쩌다 그리 된 것이다. 젖병은 먹는데 분유는 퉤 뱉어내는 건만이에게 맞추어 간 거지. 미리 계획했더라도 어려웠을 지난 일이다.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한 권씩 있다는 노란색 <임신출산대백과>를 아시는가. 그 책에 ‘일하는 엄마의 모유수유’ 에 대해 한 챕터가 실려있다. 믿을 만하게 기댈 곳 없던 유축완모맘은 그 꼭지를 <수학의 정석> 집합 마냥 곱씹었더랬다. 맘카페에도 흔치 않은 케이스인 ‘완모워킹맘’. 시즌마다 가던 해외출장도 여러 번 고사하고, 쭈쭈로 이어졌던 건만이와의 끈끈함은 애미 턱까지 키가 자란 지금도 끈적하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오는 이맘 때면 통곡의 그날이 생각난다. 추억의 서랍을 열어 글로 담아둘 수 있어 감사하다. 이만 저장. 발행.



사진출처 pixabay.


+덧마디.

글로 추억 소환하다가 방구석 통곡녀 될 뻔.

내 글에 울다니.

마른 젖이 돌겠다.



오늘도 일상을 배워가는 길=STREET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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