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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디 Dec 12. 2023

어머니, 한자급수시험 신청 안 하세요?

뒤늦게 보내는 편지

11월의 어느 금요일. 7살 건순이가 받아온 유치원 생활 안내문에 한자시험신청서가 있었다.

한자능력검정시험 8급 참가 신청 안내
-시험일시 : 2023년 12월 12일 (화) 오전 11시
-시험대상 : 유아3학년 응시희망 유아
-접수방법 : 전형료 15,000원을 신청서와 함께 제출합니다.
가능한 전체 어린이들이 함께 참여하는 기회가 되면 좋으나 필수는 아니오니 원하시는 분들만 원서와 참가비를 보내주세요.
유치원에서 수업 중 진행되오니 가정에서 협력하여 유아의 흥미와 관심에 따라 적절히 지도해 주세요.


유치원에서 한자를 배웠다는 이야기는 전혀 못 들었던 애미다.

“건순아, 유치원에서 한자를 배우고 있어? 여기 안내문 보니까 12월에 8급 한자급수시험이 있다고 하는데 건순이는 어떻게 하고 싶어?"

“아, 그거 안 해도 되는 거야. 엄마, 엄마! 나 오늘 장구 쳤는데 이렇게 하는 거다! 덩덩 쿵딱쿵, 쿵딱쿵딱쿵딱쿵, 쿵딱쿵쿵딱쿵, 쿵딱쿵딱쿵딱쿵.”

“우아, 멋지다. 엄마도 가르쳐줘. 처음 듣는 장단이다.”

“엄마는 무슨 장단 아는데요?”

“덩기덕쿵더러러러 쿵기덕쿵덕. 엄마는 이거 알지."

“우리 같이 해보자. 근데 나는 ‘덕’이라고 안 하고 ‘딱’이라고 해. 키야하하핫까르르르.

그래 너에게 딱이다 딱. 한자보다 장구에 꽂힌 건순이와 별달거리장단을 쿵딱거리며 급수시험 신청서는 어디론가 흘러가버렸다.




그다음 주 금요일. 유치원 하원버스에서 내리는 건순이가 울먹이듯 뭐라고 말을 한다. 가까이 다가가 귀 기울여 거듭 들어보았다.

“엄마, 나 시험 그거 할래요. 나만 안 해서 시험 볼 때 혼자 따로 있어야 한대요."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잠깐. 상황판단을 해보자.


시험접수마감일 전날 선생님께 개인톡이 왔었다.

건순이 어머님, 한자 8급 시험 신청 안 하는 걸까요? 내일까지 마감일이라 개인적으로 여쭤봐요. 문제를 읽고 객관식으로 풀이하는 것으로 쓰는 문항은 있지 않고 음, 훈, 한자를 익히면 되어요. 그동안 유치원에서도 열심히 해왔기 때문에 가정에서 함께 봐주시고 응시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신청하지 않으셔도 답변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의견 전달하고 다시 건순이와 이야기해 봤는데 안 하고 싶다네요^^ 아이들은 다 이유가 있겠지요. 연락 감사드립니다.


이제 보니 참 그렇고 그렇네. 선생님께서 유치원 주요 공지는 문자로 알려주신다. 카톡은 영상이나 사진을 주고받는 쓰임새였는데, 개인톡을 먼저 주셨다는 건 깊이 생각해봤어야 했다. 뭐 결과가 달라졌을지는 미지하지만.


어떻든 건순이의 가슴에 삐요삐요 경고등이 들어왔다. 우리 딸 마음 보듬어 줘야지.

“건순아, 한자 시험 해보고 싶어 진 거야? “

“엄마, 마음은 바뀔 수 있다고 했지. 나 한자도 시험도 싫어서 안 하려고 했는데, 친구들이 나 빼고 다 한대. 나만 안 하니까 혼자 있어야 하는 건 더 싫어서 생각이 바뀌었어. 그냥 해볼래요.”

“그랬구나. 선생님께 여쭤보고 지금이라도 우리 준비해 보자.”


엄마 모르게 유치원에서 따라 그려온 한자교재


선생님께 톡을 보내본다. 건순이가 급수시험 보겠다고 마음이 바뀌었다며 기한이 지났지만 신청이 가능할지 여쭤보았다. 기다리셨나. 바로 신청해 주신단다. 알고 보니 안 하겠다는 친구가 건순이 포함 둘이었는데, 그 친구가 신청하게 되면서 건순이 혼자가 되었단다. 그동안 건순이의 의견을 존중해 주던 선생님도 이 상황이 우려되어 하원 전 아이에게 이야기를 해주셨던 모양이다.

그래 그랬구나. 서른 명이 넘는 반 친구들 모두 시험을 원했을까. 아이에게 참가 의사를 물어본 내가 어리숙한 애미였나. 건순이가 싫다는 걸 '좋은 거니까 해봐' 설득하고 싶지 않았을 뿐. 어쩌면 억지로 들어간 시험장에서 실패경험을 할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8급 시험지 구경도 못 했지만 학교생활 멀쩡히 하고 있는 오빠야가 옆에서 슬라이딩을 하고 있다. 아들아 너에게 한자는 바라지 않으마. 그저 직립보행 할 수는 없겠니.


건순이가 가지고 온 시험대비교재를 넘겨본다. 엄마도 모르게 유치원에서 따라 그려온 한자들이 빼곡하다. 유치원 생활에 대해 재잘재잘해 주는 건순이가 이렇게 꼭꼭 눌러쓰느라 손이 아팠다는 한 마디를 안 했다. 그만큼 관심 밖의 일이었나 보다. 뒤늦게 해보겠다고 마음 먹고 나서는 구깃해진 교재 뒷편의 기출문제를 풀어보겠다고 엄마에게 도움을 청해온다. 문제를 읽는 것 부터가 문제.


고작 6년 남짓 살아온 딸아이도 애미와 떨어져 긴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다. 말도 못 하고 기저귀 차던 1n개월에도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며 저녁 8시까지 어린이집 불을 밝히긴 했지. 아이들이 커나가며 엄마 시선에서 벗어나 보내고 오는 일상은 앞으로 더욱 복잡해져 갈 것이다. 내 아이의 모든 일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자신의 하루를 보내고 “다녀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우리 건만이, 우리 건순이 왔어?" 하고 달려가 꼭 안아주겠다. 건순이가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애미에게 털어놓은 고마운 마음을 안아주고 격려해 주련다. 그래. 오늘도 '깨달음'을 한 줌 얻었다.




김종원 작가님은 <66일 자존감대화법>에서 한 게 없는 아이와 한계가 없는 아이는 ‘이것’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깨달음’이다.

누구나 배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배운 것을 실천을 통해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남길 수 없죠.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사실을 전합니다. ‘설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안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깨달은 것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아이가 모든 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촌지아님. 뒤늦게 보내는 참가비 15000원


“엄마 나 유치원에 시험돈 뭐 있거든? 그거 우리 선생님이 선생님 꺼로 먼저 내주셨대.”


아차, 참가비. 이제 와서 돈만 덜렁 보내기도, 봉투에 넣기도, 선생님 카톡으로 송금하기도 모두 내키지 않아 뇌를 굴려본다. 돌돌 말은 마음을 건순이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 보냈다. 현금도 잘 안 가지고 다니는 요즘 세상에 재촉도 없이 먼저 참가비를 내주신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스승의 은혜를 한 겹 정도는 갚을 수 있기를.



+덧사진

어젯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서 써놓고 아침에 주고 간 편지


+덧마디.

건순아. 편지 고맙고 사랑해. 엄마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자까여서 행복해.



오늘 12월 12일 한자급수시험날 아침. 건순이는 손바닥만 한 노트에 자유롭게 춤추는 글씨를 남기고 "장구치고 올게!" 유치원 버스에 올랐다. 시험 is 뭔들. 그녀가 마음을 빼앗긴 건 한자보다 장구다.

덩덩 쿵딱쿵, 쿵딱쿵딱쿵딱쿵. 애미는 너의 '딱'을 '딱'한다.



오늘도 일상을 배워가는 길=STREET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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