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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Feb 20. 2021

남편, 그러니까 자기의 계획이 백수가 되는 거라고?

그렇다면 피 터지게 싸워보자, 우리!


남편의 입에서 조기 은퇴, 경제적 자유니 독립이니 그런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의 창대한 삶의 목표가 백수라는 것을.


한심한 나는 남편을 향해 '자기 이미 경제적으로 독립했잖아?'같은 말들도 했었지.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그땐 정말 경제적 독립의 주어가 '부모로부터'라고 생각했다. 친절한 남편이 쉬운 경제서들을 권해줘서 무지에서 탈출하며 일을 하지 않아도 지출을 충당할 수 있는 정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남편의 원대한 목표이자 계획이라는 것도. 훌륭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내가 맘 편히 일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다만 남편이 말한 시기가 문제였을 뿐.


남편은 올해엔, 내년엔, 2년 안엔 꼭! 백수가 되겠다 다짐했다. 장난만은 아닌 것이 어느 날은 우리의 총 자산과 유동자금, 지출내역을 깨알같이 적은 엑셀 파일을 보내주기도 했는데 세부항목과 내용이 너무나 구체적이라 좀 놀랐다. 물론 나는 일십백천만..아... 이건 또 뭐고, 이 항목은 일십백천만십만백만...또? 하다가 대충 보고 남편의 꼼꼼함만 극찬을 한 채 창을 닫았지만.



남편은 정말 존경스러웠다. 그는 닥치는 대로 경제서를 읽는 듯하더니 슬슬 구체화 작업에 들어간 듯 관련 유튜브를 뒤지고 세부계획을 수립해나갔다. 그의 목표를 응원했지만 단기간에 이룰 수 없겠다 생각한 게 사실이었는데 조금만 고민을 더하면, 상황을 고려해 구체화 작업을 시키면 어쩌면 그 백수 삼식이랑 곧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버킷리스트에 있던 에어비앤비를 떠올리며 지방의 소도시에서 에어비앤비를 운영할 계획을 나누는가 하면, 상가건물을 매입해 월세를 받는 일은 어떤지에 대해서도 상의했고, 남편의 시간이 자유로워지면 그동안 내가 못해왔던 일을 하는 건 어떨까 고민하기도 했다. 모든 게 구체적이면서도 꿈같았고 이룰 수 없을 것 같지만 못 할 이유도 없을 것처럼 보였다. 유튜브를 찾아볼수록 신이 났고 어서 남편이 백수가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안의 불안을 감지하기 전까지 말이다.


뜬구름이라고 생각했을 땐 웃어넘겼던 것들이 남편의 엑셀 시트 안에서 자꾸만 숫자로 바뀌어 내 눈앞에 도달할 때쯤 나는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미세한 불안을 눈치챘다. 그 녀석이 알게 모르게 커져 점점 신경 쓰이게 될 때까지 방치했지만.


사달은 뜻하지 않게 났다. 평화롭고 평범한 저녁, 나는 대수롭지 않게 우리의 오래된 차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편 역시 농담처럼 '아, 나는 차 없애는 걸로 계획 세워놨는데! 필요할 때 빌리면 되니까'라고 답했다. 그 말이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싫은데 차는 있어야지. 한마디면 바로 수정될 계획인 것을 다 알면서도 내 불안은 그 한마디에 존재를 드러내고 말았다.


왜, 다 팔지 그래?


말을 하면서도 주워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내 손을, 아니 입을 떠나고 말았다. 계획일 뿐이라던 남편도 냉랭한 분위기 속에 입을 다물었다. 평소라면 늦은 저녁을 먹는 그의 앞에 앉아 하루의 이야기를 같이 나눴을 텐데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책을 읽으며 남편의 등을 자꾸 넘겨다보았다. 이러려던 게 정말 아니었는데 모든 게 엉망이 됐다.


남편이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시작한 사이 나는 아이들에게 TV를 켜주고 오랜만에 특기를 살려 긴 샤워를 시작했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씻는 일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실은, 내 안에 가장 큰 진심은 남편을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가 일주일에 다섯 권이 넘는 재테크 책을 읽는 이유, 은퇴를 위한 엑셀 파일을 수정하고 또 매만지는 이유를 나는 잘 알았다. 한 회사에서만 14년. 그가 지금 받고 있는 압박과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하루하루 출근하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옆에서도 느껴졌다. 그럴 때 남편이 억지로 회사에 가지 않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언제 망설임 없이 나와도 된다고 말했으면서도, 그의 건강과 마음이 최우선이라 강조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첨예하게 대립한 불안을 감지하자마자 날을 세우는 내가 너무 후져서 씻는다는 핑계로 울었다.



내게 불안은 끝과도 같았다. 부모님은 나를 걱정과 불안으로 키우셨다. (아이를 낳고 보니 나 역시 똑같은 절차를 밟고 있지만) 안전한 일들로 가득한 삶 뒤엔 부모님의 걱정과 불안이 있었고 그 안에서 자란 탓인지 원래 성격 탓인지 도전이나 모험이 반갑지 않았다. 나는 불안한 일들은 하지 않았고 이미 시작된 불안이라면 끝내버리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방송작가가 되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건 그 일이 모든 불안을 껴안고 있다는 점이었다. 방송 날짜는 절대 바뀔 수 없었다. 그러나 섭외는 되지 않았고 잡았던 아이템은 무산이 됐고 편집을 뒤집고 아예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등 매주 매일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같았다. 그것들을 의연하게 해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고 순서 없이 엎지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삶의 네 귀퉁이에서 불안이 서서히 내 목을 조여 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사는 내내 긴 숨과 눈물이 일상이었다. 내가 그 시절의 불안을 어떻게 지나왔는데 또 삶에 불안이 드리우게 할 수 없었다.


여전히 긴 샤워를 하는 동안 나는 눈물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두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첫 번째로, 지금의 불안이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남편의 엑셀 파일 안에는 숫자들이 가득했다. 사람 사는 일이 돈에서 시작해서 돈에서 끝나는 일이 맞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런 것엔 크게 관심 없었다.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지만 자산은 충분했다. 10년 전엔 대출금을 제외하면 순자산이 일억도 안됐던 우리였다. 그때의 내가 10년 후, 지금의 자산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놀랄까, 물론 결코 부자도 아니며 중산층엔 낄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수준이지만 그 자산이 타인의 기준에 한없이 부족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둘째를 기관에 보내고 나면 나는 일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남편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남자라는 걸 잘 알았다. 우리가 뭐든 하는 이상 마이너스가 될리는 없었다. 악의 시나리오를 써서, 그런 날이 온다 해도 남편과 함께라면 털고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진짜 두려운 건 도대체 뭘까? 온갖 숫자들로만 이루어진 계획들 말고 큰 방향, 우리가 살게 될 구체적인 모습이 필요했다. 견고하게 쌓아놓은 우리의 안정된 일상이 무너진 뒤의 일이 하나도 보이지 않다는 것, 아무래도 그게 걸렸다. 둘 뿐이라면 더 용감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이들을 하나씩 안고 '어머,이 길 완전 아니었네 에라이 호호'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계획은 더 정교하고 촘촘해야했다. 



두 번째로 '불안'을 역으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경계하는 삶의 불안은 어쩔 수 없이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했다. 숱한 불안으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나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써왔다.  안에 자라고 있는 안을 인정하고 불길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 그것은 남편과 더 많이 이야기하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용기를 내 한발 나아가는 길 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불안의 불길은 더 활활 타올랐다. 움직여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차를 없애는 걸로 수정했다는 남편의 엑셀 파일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숫자 말고 구체적인 방향이 필요하지 않겠어?' 화해도 없이 질문을 퍼붓는 나에게 남편은 '그걸 알면 내가 회사를 그만뒀겠지.'라고 말했다. 그 안에 누적된 남편의 피로와 오래된 책임감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나는 남편을 위로하는 대신 연주를 앞둔 악기처럼 현을 팽팽하게 당겼다. 제 시작이다.

'다 좋은데 장사는 싫어! 그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야' 뭘 원하고 어떤 것이 싫은지 정확히 구분해 내야 했다.




그 밤, 나는 조금 앓았다. 내 위장은 어째서 감정선과 맞닿아있는 건지 여러 단어들이 가슴팍에 걸려 내려가지 않고 달그닥거렸다. 새벽에 찜질팩을 데워서 배 위에 올려주던 남편은 아침에 날 보고 농담처럼 물어왔다.

동네책방은 어때?

장사는 싫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 동네책방 네 글자에 환장하게 마음이 동한다. 무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당연히 선택엔 리스크가 성장엔 성장통이 따른다. 남편, 자네의 목표가 백수라고? 그렇다면 피 터지게 싸워서 한번 쟁취해보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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