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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Feb 16. 2021

삼시세끼 걱정이 없는 이유

어제는 택배, 오늘은 반찬배달


친절한 택배 문자서비스가 도착을 알려왔다. 나는 산 게 없는데! 가만, 우체국 택배라면 시댁에서 보내신 게 틀림없다.


아무렴, 문을 열었더니 현관 앞에는 토마토 한 상자와 시금치, 무,  곱창김, 부산어묵, 거기에 어머님이 멸치를 한 박스나 쏟아부어 손수 내신 육수 두병이 꽁꽁 언 상태로 놓여 다. 과연 택배 강국, 배달의 민족인 나라라 가능한 경상도 산지직송 배송 시스템이다!



받은 택배를 정리하는 동시에 어머님께 전화를 걸어 감사인사를 전했다. '어머니 가게 바쁘실 텐데, 멸치육수까 내서 보내셨어요?'라는 내 말에 시금치도 다듬어 보내셨다는 대답을 듣고 나니 감사하다는 말을 세네번해도 부족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의 손은 늘 바쁘다. 낮엔 누군가의 머리를 만지고 저녁엔 아들 집에 보낼 시금치를 다듬고 마늘을 까고, 여름의 새벽엔 오디를 한 알 한알 따서 얼려 넣어 주시기도 한다.

시댁에서 보낸 택배 상자 안에 딸기는 달콤한 냄새로 온 집을 채우고, 그 상자 안에 있던 참기름을 먹어본 뒤엔 마트에서 파는 제품을 먹을 수 없게 됐다.




산지직송으로 한 과일과 채소를 책임지 시부모님이 있으시다면 거기에 결코 뒤지지 않을 우리 엄마 아빠도 있다. 우리 집은 마켓컬리 쓱배송, 로켓와우?! 그런 게 전혀 부지 않 스피드와 편리함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이다. 



응 엄마, 하고 전화를 받으면 '현관문 열어봐! 우린 간다.'하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소식을 알려온다. '여기까지 와서 왜 안 들어와?!' 아쉬운 내가 볼멘소리를 해봐도 소용없다. 5인 이상 모임금지라서, 지금 어디 가는 길이어서, 동생네도 반찬 갖다 주러 가야 해서, 각양각색의 핑계를 대고 엄마 아빠가 떠난 자리에는 양손에 들어도 부족할 반찬이 놓여있다.



손녀가 좋아하는 호박전과 깻잎지, 사위가 좋아하는 콩나물무침, 둘째가 좋아하는 메추리알장조림과 멸치볶음, 어느 날에는 국이나 찌개까지 냄비채 들어있다. 요리가 다 뭐란 말인가 우린 그저 먹기만 하면 된다. 그뿐인가, 아이들이 아쉬워할까 봐 그러시는지 늘 뽀로로 빵이나 젤리 같은 것들도 빠짐없이 넣어주신다. 정말이지 언제 받아도 세심하고 다정한 가방이라 매번 마음이 찡하다.



엄마는 알고 있는 것이다. 밑반찬 두세 개만 있어도 밥상 차리기가 얼마나 수월한지. 행여 딸이 아이들과 밥해먹는 일이 힘들고 지칠까 봐 삼사일 두고 먹어도 좋을 반찬들을 가방 가득 담아 두고 가시는 것이다.

내가 한 반찬이라곤 하나도 없이 엄마가 해다 준 것들로만 상을 차리는 날에는 어렵고 고단한 세상을 쉽게 공짜로 사는 느낌이 든다. 그런 날엔 무언가를 향해있던 억울한 마음까지도 스르르 녹고 만다.





양가의 문 앞 전쟁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어머님 아버님은 귀신같이 4인 가족의 쌀 소비량을 꿰고 계셔서 쌀 한통 비웠다 싶으면 어김없이 쌀자루 하나가 현관문 앞에 우체국 택배 딱지를 붙인 채로 놓여있다. 그 어떤 쇼핑몰의 정기배송 시스템보다 정확 배송 주기를 자랑한다.



시부모님이 우리 집의 모든 쌀과 잡곡을 책임지신다면 우리 부모님은 김치다. 일 년 먹을 김장부터 아이들이 먹을 동치미, 때때로 열무김치 배추김치, 나박김치, 파김치, 총각김치까지 어느 하나 빠지면 서운할까 싶으신지 세상에 모든 재료로 김치를 담 기세로(실제로 콜라비김치, 양배추 김치에도 마구 도전하신다) 냉장고를 채워주신다. 덕분에 우리 집 김치냉장고 좌측쌀이, 우측에는 김치가 사이좋게 들어있다. 좀비 떼가 세상을 점령한다 해도 우린 현관문만 잘 사수하면 6개월 동안 김치볶음밥을 해 먹으며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감사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한번은 참기름 값을 통장으로 넣겠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님은 남편과 나에게 '엄마를 뭘로 보고!'라고 한마디 하셨다. 자칫 무뚝뚝하고 세게 느껴질 수 있는 경상도 사투리였는데 그 말이 오래 기억날 정도로 좋았다. 서른여덟과 마흔이 되어버린, 어느새 책임질 것들이 인생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 나이를 잊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전화기 저 편에 300km도 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엄마를 뭘로 보고'라고 외칠 때의 어머님이 우리 인생을 아주 크게 둘러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갓 도정한 쌀을 바로 받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자기 전에 주문한 반찬을 아침상에 바로 올리는 게 가능한 시대를 살면서도 굳이 양가에서 주시는 쌀이며 반찬을 거절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남편이나 나나 스스로의 인생에 바라는 것들을 더하기보다 하루하루 소모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 일상인데 부모님의 택배와 반찬을 받을 때마다 발끝부터 삶이 채워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매번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도 끝내 내 삶을 떠나지 않는 끈질긴 고민에 괴로운 날에도 양가로부터 오는 부모님의 마음으로 우리는 전히 서로가 서로에게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되고 만다.



'자기야, 나도 애들한테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되어 줄 수 있을까?' 하면 듣고 있던 남편은 여지없이 '아니!'라고 말해준다.(뼈를 때리고 그르냐) 안다. 나도. 그 큰 사랑에 감히 내가 비할 수 없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그들의 기대에 조금씩 피로감을 느껴왔으면서도 때론 넘치는 사랑에 고마워하기는 커녕 지치는 날이 있었으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 인생을 꽤 많이 살아오면서 결국 그것들이 힘든 시간의 나를 지탱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누는 사랑 말고 언제까지나 받기만 해도 좋을 그 무한한 사랑에 오늘도 남편과 나는 염치도 없이 기대서 산다. 




'어머니 딸기 너무 맛있었어요!

엄마 메추리알 둘째가 너무 잘 먹어.' 그런 말들을 하면서, 이 시절이 너무 빨리 그리워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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