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지 Jun 15. 2017

긴 여행 끝에 남겨진 마음

나를 위로하는 것들_여행은 삶 #12 

시와 사막에 누워 밤새도록 쏟아지는 별을 보며 생각했다. 앞으로 남은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억울함 따윈 없을 만큼 나는 충분히 위로받았다고. 충분히 위로받은 마음이란 생각보다 내게 중요한 마음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점점 다가올 때, 돌아가 또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막막해질 때. 이것만으로도 내 앞에 펼쳐질 삶들을 마주할 용기가 솟았다. 결국 여행의 끝자락에 남겨진 건 유창한 영어실력도 멋진 제2의 인생 계획도 아니었다. 빈 통장과 이런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참 이상하지. 감사한 마음이 생기자 내 몸은 자연스럽게 한국에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음식이 먹고 싶단 생각이 자주 들고 매일 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얘기하는 횟수가 늘었다. 옷장 속 옷들이 잘 있는지 신발장 속 신발들은 잘 있는지 별게 다 궁금해졌다. 자주 가던 가게는 여전한지 한국엔 요즘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서울에 두고 온 일상이 궁금해질 무렵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시간은 흘러 서울에 머문 지 어느덧 구 년째. 그동안 한국 밖 여행도 꾸준히 했으나 생업과 주거지는 여전히 서울에 두고 있다. 언제든 나갈 준비는 되어 있으니 스스로는 서울에 장기 체류 중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원 없이 여행을 한 번 하고 나면 이전에 품었던 삶에 대한 물음에 명쾌한 답이 생길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내 경우엔 근본적 질문들이 단순히 시간만 흐른다고 절로 답을 만들어내진 않았다. 오히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의 삶이 훨씬 중요했다. 여행에서 얻은 에너지가 일상에서 소멸되지 않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 일상에서의 배움이었고 이건 '삶은여행은삶'의 연재를 시작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현실에 함몰되지 않고 온전히 여행자로서 계속 서울살이를 이어가기 위해서.


물론 여행에서의 다양한 경험들이 내게 힌트를 주긴 했다. 내가 '누구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존재할 때 행복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찾아갈 수 있도록. 고작 몇 번의 여행만으로 인생이 확 바뀔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래도 뭔가가 달라질 수 있다면 그건 뭘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무엇이 내 삶을 위로해주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는 거다. 여행의 경험들은 내 몸과 마음 여기저기에 차곡차곡 쌓였고 어떤 순간에도 나를 다치지 않게 하는 삶의 근육이 되어 주었다.


진하게 위로받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모두 다 자연에 푹 파묻혀 있을 때였다. 맘껏 마시고 뱉을 수 있는 공기, 콜라 하나에 오천 원이던 노르웨이에서도 꼬박꼬박 무료로 먹을 수 있었던 물. 매일 느껴지는 바람과 고개만 들면 보이는 하늘과 구름. 너무나 당연해서 제대로 느껴본 적 없는 그 존재들에게 여행 내내 진심으로 감사했다. 심지어 그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걸 무한정 주고 있었다. 돌아와 서울에 쭉 머물다 보니 더 확실해졌다. 단골 카페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이 도시 한가운데서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누구나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 하나쯤은 알고 있을 거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매일 행복할 순 없어도 매일 나를 위로할 순 있으니까. 나를 위로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해질 무렵 언덕에 올라 매번 같은 자리에 앉아 매일 다른 풍경을 바라본다.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고 좋아하는 이들의 얼굴을 그려본다. 눈을 감고 소리를 듣는다. 바람을 손끝에 두고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러다 해가 떨어지면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오늘은 뭘 먹을까 생각하며 집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곁에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 그 마음이 매일 살아있음에 또 감사했다. 


겨울엔 봄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까치에게


올해도 어김없이 피어준 봄꽃에게


여름엔 하루가 무섭게 쑥쑥 자라는 담쟁이 넝쿨에게


가을엔 알록달록 단풍들에게, 위로받고 또 위로받는다.




'여행의 경험은 어떻게 일상에 뿌리내리고 삶을 변화시키는가?' 에 대한 여행 탐구에세이. 3회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금상을 받은 이 글들이「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세상에 나옵니다. 이곳에서 책을 예약 구매해주시는 분들께 특별한 선물을 함께 드리고 있습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