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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꾸녕 Oct 15. 2023

막 달리자

살기 위한 의무적인 달리기

날 뛰기를 좋아하던 애

나는 어릴 적부터 정적인 놀이보다 동적인 놀이를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밖에서 뛰어노는 일이 많았다.

나의 어릴 적, 그러니까 1990년대만 해도 여자는 인형 놀이하고 소꿉장난 좋아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이어서 보수적인 친척 어른들은 "너는 뭔 여자애가 이리 뛰어다니냐"라며 꾸중을 하곤 하셨는데 정말 다행히 우리 부모님은 그런 사상을 갖고 계신 분들이 아니라 자유롭게 날뛸 수가 있었다.

 심지어 우리 아빠는 축구를 매우 좋아하셨는데 시간 날 때면 잘 걷지도 못하는 아장아장하는 나를 데리고 공을 차러 다닌 사진이 앨범에 가득할 정도로. 


유년 시절 거주했던 맨숀에는 죄다 또래 애들이 남자애들이어서 집 앞 공원에서 자전거 경주, 높은 바위에서 누가 더 독수리처럼 뛰어내리는가, 줄무늬 거미 많이 잡기, 방방 공중 회전하면서 타기, 100원짜리 붕붕이 자동차 타기, 술래잡기 등의 갖가지 놀이를 하고 놀았는데 매일 몸으로 놀다 보니 부상의 빈도도 높아 때꾸정물 가득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집에 가서 맴매를 맞거나 울음을 그치지 않아 할머니가 안고 어야 둥둥해주시면서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으러 온다는 할머니의 귀여운 협박을 당하는 날도 많았다.


이런 나의 활동적인 성향은 꾸준히 이어져 학교 생활 내내 두각을 나타내어 체육 부장을 놓쳐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급기야 대학도 체육 교육과에 입학하며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교육자로서 발휘하자라며 나름의 포부를 갖기도 하였다.


위기는 그냥 위기로

 누구나 그렇듯 살면서 집 안에 위기는 한 번씩 있는데 우리 집은 내가 중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였다. 꽤 장기간인가? 아무튼 굉장한 가난에 쫓긴 것은 아니지만 용돈이 없어서 친구들이 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갈 때 혼자 집으로 가거나, 친구들이 옷을 살 때 구경만 하고, 급식비 달라고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아 담임 선생님께 급식비 지원이 필요한 상황에 대해 상담을 요청하고, 교통카드에 돈이 부족해 두 세 정거장을 일부러 걸어가서 기본요금으로 타는 정도. 딱 그 정도의 가난함으로 사춘기와 대학 새내기 생활을 보냈었다.  


넉넉하지 못해 주눅 들었던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당시 워낙 긍정적인 성격이었던지라(지금은 아니다) 

가난을 뒤집어서 즐겼던 것 같다. 우리 집은 현재 이래저래 한 상황이라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해! 나는 쉬지 않고 알바 뛰어야 해! 하며 공부는 뒷전이었던 나의 대학 시절은 원래 목표였던 체육 교사와는 전혀 다른 길로 나를 데려다주었고, 바로바로 취업이 되고 바로바로 돈을 벌 수 있는 일만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업직 위주로 흘러가게 되었다.

 (중간에 기간제 교사로 일 해 본 적도 있긴 했는데, 나는 내가 운동을 잘하고 내가 하는 걸 좋아할 뿐이지 성장하는 중인 다양한 성격의 청소년들을 사랑으로 품을 만한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바로 꿈을 접었다.)


나쁘지 않았다. 일을 못 했던 편이 아니라 성과를 잘 내기도 했고 그러면서 돈을 꽤 모았다. 

학자금 대출 다 갚으면서 부모님께 20대 중반에 1000만 원을 드리고 20대 후반에는 첫 가게도 차렸으니까 말이다.  물론 일은 너무 힘들었다. 영업직이란 것이 매일 나와의 싸움과 비슷한 직종이기 때문에.


영업일을 하면서 나를 관리하고 컨트롤하는 법에 대해 배우고 가게를 시작하게 되었고 가게를 시작하게 되는 순간 예전에는 돈을 잘 벌었지만 돈을 잘 못 버는 사장님이 되고 말았다. ㅋㅋ


나 기분이 왜 이럼?

지금 하는 가게들은 우리의 마지막 브랜드라고 생각하며 뼈를 갈아 넣으며 일하고 있다. (마지막 브랜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 마지막 브랜드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넉넉한 자본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 수 있겠으나 매일매일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해서 나를 코너로 몰아넣는 일이 발생하곤 하는데 한 때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쉬지 못하고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면 나한테 뭐가 좋을까,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할까, 편히 쉬고 싶다는 막연한 고민과 걱정에 우울감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시기가 있었고 어느 순간 이러다가 나 진짜 죽는 거 아니야? 생각을 하게 될 때 즈음 그때부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숨을 넘기자

운동은 대학 졸업 후에도 꾸준히 했었다. 대표적으로 대학 동기들과 풋살 클럽을 만들어서 월 1회 정도 했었는데 다들 사회적 위치에서 바빠지면서 점차점차 모이지 못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등산, 헬스, 골프, 러닝 등을 번갈아가며 시간 날 때만 혼자 하곤 했다.

달리기를 매일 하게 된 것은 2022년이었다.

2022년이 우울감이 극심한 최고의 해였는데 그때 매일 5km 달리기를 시작했다.

집에서 한강까지의 가까운 거리가 꾸준한 달리기를 하기에 제격인 점이 다행이었다.

매일 같은 길을 달리면 꽤나 지루한 운동이 되었을 수 있었는데 다양한 코스로 5km를 채울 수 있어 달리기가 지루하지 않았다.

비가 왕창 쏟아지는 날에도 그냥 달렸다. 오글거리는 표현일 수 있으나 달릴수록 등을 거쳐 심지어 팬티까지 흐르는 땀에 신체적 분비물과 정신적 불순물이 함께 걸러 나오는 기분이었다.


달리기 동호회 크루의 등장

요즘은 나혼산 기안 84의 달리기 편 이후에 내가 달리는 코스에 젊은이들의 러닝 동호회가 꽤나 많이 보인다.

(나는 연예인에 별로 관심이 없지만 기안 84의 팬, 팬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니까 기안 84를 응원하는 사람 중 한 명인데 응원하게 된 계기가 그가 달리게 된 이유가 나와 꽤나 비슷하단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체로 뛰어가는 동호회인들이 나타나면 아무래도 인원이 많다 보니 한참 숨찰 때 페이스가 깨지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옆으로 비켜야 하는 불편함이 있거나 괜히 주눅 드는 기분이 드는 것은 굳이 비밀은 아니다. 그러면서 어차피 추워지고 비 오면 안 뛸 거면서 참 전세 낸 것처럼 불편하게도 하네 하는 심술이 드는 날도 있다. (지금 적으면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생각할 것이 아닌데 힘들고 숨차니까 괜히 짜증이 났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도 운동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어떠한 유행으로 꾸준한 생활 체육에 입문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니 그런 젊은이들의 동호회가 나타나면 괜히 짜증 내지 말고 속도를 줄이고 먼저 보내는 쪽으로 페이스를 바꾸기로 방금 반성하고 결심한다.


막 달리자

1년에 한 번 정도는 크던 작던 대회에 나가려고 노력한다.

한 번 정도는 수 만 명의 사람들 사이에 섞여 내가 혼자 뛸 때 어느 정도의 페이스로 달리고 있는지 보고 속도의 목표를 재설정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남들보다 잘 뛰기 위해 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체육인의 피가 흘러서 그런지 그래도 잘 뛰는 편에 속하고 싶은 속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막 뛸 것이다. 가벼운 러닝화와 주머니가 있어서 휴대폰을 넣을 수 있는 기능성 운동복, 텐션 정리를 해주는 이어폰, 많은 땀을 흡수할 순 없지만 없는 것보다 나은 헤어밴드, 어느 정도 뛰었는지 알려주는 스마트워치를 장착하고 무릎이 허락해 줄 때까지는 달려볼 생각이다.


복잡한 나를 다스려서 평온을 찾고 가쁜 숨에 집중하는 뜀의 시간이 온전한 혼자만의 휴식이 되어 내일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로 가득 찰 수 있도록 땀을 뚝뚝 흘리며 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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