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꼭대기에서 라면을 외치다

by 홍화

내가 가장 맛있게 먹었던 라면은,

21살 군대에 가서 초번 근무를 서고 추운 날씨에 몸을 녹여주었던 '공화춘 짬뽕'과

술을 잔뜩 마신 뒤 후임이 끓여준 '신라면 뽀글이'였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맛은 아직 잊히지 않는다.


그때 그 맛이 떠올라 종종 끓여보곤 하지만, 추억 보정 효과인지 그때 그 시절의 라면 맛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

이렇듯 나의 20대는 아마도 많은 또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PC방이든 어디든 라면은 늘 곁에 있는 소울 푸드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30대가 되면서부터 단 한 번도 맵다고 느낀 적이 없는 신라면이 맵게 다가왔다.

그때부터 라면과는 조금씩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해외여행으로 동유럽 3국을 가게 된 일이 있었다. 코로나 훨씬 전인 2019년도쯤의 일이었을 것이다.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 일정의 패키지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오스트리아에서 알프스 산맥을 마주하게 되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높은 산자락은 5월임에도 만년설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알프스 산맥의 대자연을 실컷 즐길 수 있었다.

내려가기 전 들른 산장 같은 곳에는 의외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간단한 과자와 음료를 팔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사이에 붉은 봉지의 '신라면'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스위스 알프스에서 신라면 컵라면을 엄청 비싸게 판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산장에서 봉지라면을 판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친구와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 알프스에 왔는데 신라면 한 사발 해야지."

가격은 5유로, 한국 돈으로 만원이 살짝 안 됐던 금액이었다.(그 당시 가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서 지금 와서 찾아보려 했지만, 아쉽게도 그 산장의 라면의 가격은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다.)


이국적인 눈 쌓인 산을 보며 먹는 너무나도 낯익은 맛.

비싼 가격이어도 한국인의 라면 DNA에 이끌려 기꺼이 사 먹게 되는 마성의 빨간 봉지의 라면이었다.


눈 덮인 알프스 풍경을 앞에 두고 마신 콜라와 함께 먹은 라면.

그 맛은 사실 평범했다. 외국인들은 매운 걸 싫어하니 라면물을 표준보다 약간 더 잡았던 것 같다.

원래 라면물을 적게 넣어 먹는 나로서는 다소 싱거운, 한강물라면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며칠째 파스타와 느끼한 유럽 음식에 지쳐 한국 음식이 너무 그리운 나에게, 그 약간의 밍숭한 매콤함은 더할 나위 없는 위로였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K-컬처 열풍이 대단하지 않던 시절이라, 유럽 한가운데서 한국 라면을 먹는 경험 자체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돌아보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라면'하면 무언가 떠오르는 에피소드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한 끼의 간단한 음식이지만, 누군가에겐 군대의 추억이고, 누군가에겐 여행의 기억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겐 삶의 한 장면이 된다.

이렇게 전 국민이 어떤 한 가지 음식에 대한 추억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서민음식, 라면'에 대해 다시금 대단함을 느낀다.


오늘, 간만에 라면을 끓여볼 생각이다. 아마 싱거운 한강물라면이겠지만, 나는 오늘 잠시 알프스로 떠나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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