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종종 농땡이를 치곤 했다. 치기 어린 20대 초반의 나는 원하지 않은 대학에 온 불만을 그런식으로 해소했다. 농땡이 치고 영화도 보고, 카페도 가고, 학교 도서관에도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 도서관에 갈거면 굳이 농땡이를(?) 하는 생각도 들지만, 우습게도 대학 수업은 싫어도 도서관은 좋았다. 씨네 21 신간호를 늘 볼 수 있었고 보고 싶은 책들도 거의 다 있었다.
그즈음 강신주 작가의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 전체적인 어투나 내용이 강한 편이라고 느껴서 그 분의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으나,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아주 강조했다는 건 기억이 난다. 착한 아이 증후군에서 벗어나 부모에게 나쁜 놈, 년 소리 들을 각오를 해야 비로소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정도까지 해야 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는데 최근에는 어느정도 납득이 간다. 부모님께 불효자가 되겠다는게 아니라 부모로부터의 정서적 독립이 그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고, 마음 단단히 먹어야 될까말까 한 일이며, 그만큼 필요한 것이라 의도적으로 조금 더 센 어투로 쓰지 않았을 까 싶다.
임신 초기 호르몬의 변화로 감정이 널을 뛰던 어느날, 출산 후 이사 갈 동네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 하다가 아이처럼 엉엉 울었더랬다. 친정 근처에 살고 싶다고, 외할머니가 해주시는 밥이 먹고 싶다고 (아마 이 때는 입덧이 있어서 더 서러웠나보다) 울었다. 친정 근처로 가려면 남편이 꽉 막힌 출퇴근 길을 오로지 운전으로만 왕복 3시간씩 다녀야 하기 때문에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남편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결국 우리 둘이 해야 할 일이야."라고 다독여 줘서 투정부리는 아이의 마음에서 엄마의 마음으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고 최근에 열이 38도까지 오르는 일이 있었는데, 그토록 바라던 친정에서 출퇴근하며, 외할머니 밥을 먹으며 요양 아닌 요양을 했다. 아픈 임산부라고 가족들이 손 꼼짝 못하게 했기 때문에 몸은 아주 편했으나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줄창 들었다. 이제는 부모님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마냥 받고만 있는 것도 편하지 만은 않았다. 어느새 꽤 연세가 드신 외할머니가 밥을 차려주시는 것도 마음이 복잡했다. 퇴근해서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저녁을 챙겨먹고 있을 남편도 마음이 쓰였다. 결국 이틀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감기가 좀 더디게 낫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쪽이 더 편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결국 친정집과 한참 떨어진, 남편 회사 근처 동네에 집을 얻기로 했다. 육아를 도와줄 친정이 근처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 여전히 귀에 맴돌지만, 그래서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가정이니까, 우리의 일이니까 남편과 둘이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같이 해보기로 했다. 언제든 기댈 수 있고, 도움 받을 수 있는 부모님이 건강하게 곁에 계신 건 정말 큰 복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제는 좀 더 힘든 선택이라도,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우리의 가정 안에서 해결을 봐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남편과 내가 비로소 아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아군인지 적군인지는 육아라는 전쟁터에 나가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지금 우리는 서로의 아군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