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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May 04. 2024

임신으로 얻은 것들 1편

뜻대로 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마음

"어머님한테 들었어요. 초등학생 때 피아노 콩쿠르 나가서 부담감에 구토를 할 정도로 애살쟁이 였다고..."

  우리 엄마는 왜 저런 일을 자신의 직장 동료에게 까지 전했는지 알 턱이 없지만 사실이긴 하다. 자연주의 출산 교육을 해주시는 조산사 분이 마침 친정 엄마와 같이 근무하셨던 분이라, 아이스브레이킹 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과거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말을 들었다. 저 짧은 에피소드로 내가 마음이 약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임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피아노 콩쿠르는 누가 시켜서 나간 것도 아니었다. 전국에서 잘하는 애들은 다 온 것 같은데, 나도 잘하고 싶은데 실수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 무지하게 되었다. 작은 몸에 부담이 컸는지 콩쿠르 순서를 기다리면서 아침부터 오후까지 한 끼도 먹지 못하고 허여멀건 얼굴로 화장실만 들락거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걱정하던 크나큰 실수(종료를 알리는 종이 치기도 전에 헛 것을 듣고 혼자 멈추고 나와버림)를 하는 바람에 3등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서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애살쟁이 축에 속하고, 걱정도 많고, 스트레스에도 취약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씩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을 쓸 때마다 나와 성향이 비슷한 엄마에게 우리는 참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스타일이라고 같이 힘 빠진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하곤 했다.

  임신을 하고서도 당연히 마음 쓸 일이 많았다. 임신이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임신은 계류유산으로 끝이 났고, 남편을 닮은 남자아이였으면 했던 바람도 부질없는 욕심임을 알게 되었다. 자연주의 출산을 하고 싶지만 한동안 아이가 역아 자세로 있어서 마음을 졸였고, 정상위로 돌아온 다음에는 주수보다 머리 크기가 2주나 큰 아기라 이대로라면 제왕절개 후보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 전에는 임신 전부터 갖고 있던 자궁내막증 혹이 자궁과 유착되어 말썽을 일으키는 바람에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 소견을 받고 직장을 쉬고 있다. 직장을 쉬기까지의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3년 육아휴직을 할 계획이었기에 한 달이라도 월급을 더 받아보려고 출산휴가를 가능한 뒤로 미뤘는데, 갑자기 중간에 들어가게 되어 인수인계 문제로 본의 아니게 직장에도 피해를 주게 되었다. 출산이라는 마지막 이벤트까지도 뜻대로 되지 않을 것들이 많을 거라는 걸 이제는 어렴풋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임신이 나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다. 뜻대로 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마음, 그리고  내 뜻대로 할 수 없으니 자연스레 바라는 것이 적어진다. 적은 것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직장을 쉬게 되면서 아침마다 집 근처 공원 산책을 하고 있다. 남편이 출근하고 없는 빈 집에서는 하릴없이 이부자리를 뒹굴게 되어서, 조금이나마 규칙적인 하루를 보내기 위한 약속이다.
  공원으로 가려면 꽉 막힌 출근길을 지나야 하는데 줄줄이 서있는 차들과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지나다 보면 묘한 감정이 든다. 나 역시 지난달만 해도 저 행렬의 급행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지.

  뱃속의 행복이 덕에, 남편 덕에 아침에 공원을 걷는 호사를 누리고 있으니 잔잔한 고마움과 왠지 모를 미안함, 벅찬 마음이 교차한다. 직장에서 받는 자극과 스트레스가 사라져서인지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샘물처럼 퐁퐁 솟는다. 요즘은 행복이를 자연주의 출산으로 만나든, 제왕절개로 만나든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건강하게만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행복이의 작은 태동 하나하나가 따뜻하게 고마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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