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 직장인이라면 비슷하지 않을까. 반쯤 감긴 눈과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기만 한 몸을 억지로 깨우려 커피를 타는 모습. 누군가는 출근길에 이미 진한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랬다. 임신을 하기 전에는 말이다. 출근하자마자 커피 포트에 물부터 올리고, 나라가 허락한 마약(!) 수준의 노오란 커피 스틱을 손에 들고 무의식적으로 컵에 붓는다. 두어 번 휘휘 저어서 진한 커피 설탕물을 호호 불어 마시면 그제야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임신이 계류유산으로 끝난 뒤, 나의 몸에 자궁내막증 혹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궁내막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나, 뭐라고 탁 집어 말할 만한 것이 없었다. 결국에는 식습관과 생활습관 문제로 귀결되었다. 나름대로 찾아본 결과 양학에서도 한의학에서도 자궁내막증 환자에게 커피는 멀리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커피를 끊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도 다른 두려움이 더 컸다. 자궁내막증은 난임이나 불임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면 굳게 마음먹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커피를 끊기로 했다.
처음엔 머리가 아팠다. 커피를 수혈해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으니 몸이 반항하는 것 같았다.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하는데 좀처럼 정신이 들지 않고 멍청한 상태가 이어졌다.
뭐라도 마셔야겠다 싶어서 선택한 것이 시어머님이 선물해 주신 현미 녹차. 고소하게 볶은 현미와 여린 찻잎을 조금 넣은 따뜻한 찻물을 대신 마셨다. 노란 커피 믹스의 매력적인 달달함은 없었지만 따뜻하고 고소한 뭔가가 들어가니 그나마 나은 것 같았다. 향긋한 녹차 잎의 향이 생각보다 정신을 맑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서서히 시작된 차의 시간.
다도를 가르치시는 시어머님 덕분에 예쁜 다기와 도구들을 집에 구비해둘 수 있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차의 시간은 주전자에 물을 데우는 것부터 시작한다. 김이 솔솔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오늘의 기분이나 날씨, 분위기와 어울리는 차와 다기, 다건과 다식을 준비한다. 이것도 은근한 재미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차의 매력은 나도 모르게 집중을 하게 되는 점이다. 선방의 스님들은 혼자 있는 시간에 차를 마신다고 한다. 역시 스님들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것보다도 차를 마시는 과정에서 잡다한 생각이 들어올 틈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차의 시간은 그렇다. 물의 온도와 우리는 시간에 따라 차의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 미세한 부분에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 잠깐 딴생각을 하는 동안 원하는 것보다 진하게 우러나 쓴 맛이 나거나 물이 식어버려 차 맛이 떨어지기 일쑤이다.
따뜻한 물에 풀어지는 찻잎을 보는 것도 차의 시간에 오롯이 집중하게 만들어 준다. 찻잎이 따뜻한 물에 우러나면서 웅크렸던 잎사귀를 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동안 잔뜩 머금고 있던 봄의 싱그러운 에너지를 향으로 색으로 펼치는 것 같다. 찻잎이 다 우러난 후 다기 속에 남은 차의 향을 맡는 것도 은은한 즐거움이다.
주말은 남편과의 차의 시간. 남편은 어릴 때부터 차를 마셔온 구력이 있어서 시어머님만큼이나 차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 특히 말차 격불을 잘한다. (격불은 차선을 이용해서 말차 가루로 거품을 내는 걸 말한다.) 주말 아침에 눈을 뜨면 남편이 격불 해주는 말차를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데 나는 이 시간을 참 사랑한다.
임신과 차의 시간. 차는 커피 없는 나의 임신 기간을 좀 더 풍성하고 행복하게 채워주고 있다. 행복이가 세상에 나오면 이렇게 여유롭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좋은 취미가 하나 생겨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