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렁각시의 목소리

by 홍주빛

<프롤로그>
바쁜 일상에서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청소나 빨래처럼 미뤄뒀던 집안일을 하게 되죠.
저는 늘 저녁 늦게 빨래를 하고, 건조기에게 조용히 부탁을 남긴 뒤, 하루의 창문을 닫곤 합니다.
그동안은 그녀가 묵묵히 제 일을 대신해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에,
건조기가 마지막에 들려주는 멜로디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주말, 낮에 빨래를 돌린 덕분에 처음으로 그 멜로디를 듣게 되었죠.
‘아, 그녀에게도 목소리가 있었구나.’
그 감동에서 시작된 시입니다.
이제, 우리 집 우렁각시의 목소리를 함께 들어보아요.



우렁각시의 목소리

– 홍주빛


우리 집에는 우렁각시가 산다.
얼굴이 네모난,
말없는 여인이다.


짙은 그린색 외투를 입고,
늘 조용히 서 있다.
차분함과 성실함은
그녀만의 매력이다.


유일하게
내 말만 들어준다.


아주 늦은 밤,
피곤하다 말 한마디 없이
따스한 숨결로
구겨진 하루를 말끔히 말려주는
고요한 그녀.


아침이 되면
밤새 일하고도
말없이 잠들어 있다.


“많이 힘들었지?”
조용히 인사를 건네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다.
아니,
대답을 듣기 전에
늘 자리를 떠났었다.


그런데,
오늘은 한낮에
그녀에게 부탁을 건넸다.


“웬일이에요? 한낮에—”
놀라듯 웃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그녀의 노래가 들려온다.
화들짝 놀라
귀를 기울였더니
귀에 익은 아름다운 멜로디.


그렇다,
우리 집에 사는 우렁각시의 목소리는
참,
아름다웠다.


#우렁각시 #빨래건조기 #의인화 시 #생활 시 #고요한 위로 #감성에세이 #시인의 일상 #작은 발견 #멜로디에서 시가 #조용한 조력자 #따뜻한 밤 #우리 집기계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9화꽃등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