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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Oct 29. 2020

엄마가 말하는 성공은 이번 생엔 어렵겠지만

[주영에게] 마지막 편지

그러게. 교환일기 시작할 때쯤 코로나도 시작됐는데 그새 계절이 봄에서 여름, 가을이 지나고 곧 겨울이 올 것만 같아. 여전히 코로나는 끝날 기미가 안 보이지만 이제 진짜 마지막, 11번째 편지를 쓸게.

니가 그랬지? 교환일기 끝나면 유튜브 할 거라고. 그 카톡 보고 또 빵 터질 수밖에 없었어. 시작 천재가 이번에는 유튜브를 시작하는구먼.

너는 언제나 ‘풍덩’ 하고 잘 빠져들었던 것 같아. 우리가 같이 사무실에서 일하던 어느 날, 니가 출근하자마자 결연한 얼굴로 말했어. “선배, 저 철인 3종 경기 나갈 거예요.” 아마 <마녀체력> 읽은 직후였을 거야. 얼마 후 하정우 <걷는 인간> 읽고 매일 걷기를 시작하더니 마라톤까지 나가고, 영화 <리틀 포레스트> 보고서는 덜컥 오븐을 사더니 문소리가 영화에서 만들었던 크림브륄레를 만들었어.

어느 날은 밤새 사주 공부해서 회사 사람들 사주를 줄줄이 봐주더니, 또 어떤 날은 신춘문예에 도전하겠다며 입시 공부할 기세로 모든 소설을 밑줄 치며 분석하고 습작을 써냈어(<묘박지> 파일은 아직도 내 컴퓨터 안에 있지). 샌드위치 안에 있는 양상추도 빼놓고 먹던 사람이 갑자기 채식을 하지를 않나, 주식하는 주린이가 되었다가 이제 유튜브까지.

너 스스로는 냄비 같다고 했지만 뭔가에 도전하고 흠뻑 몰입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보통 뭔가에 올인하면 보상과 성공을 바라는데 심지어 너는 그것도 아니었어. 이만하면 됐다, 재미없다 싶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안녕을 고했어. 투자 비용이고 뭐고. 그렇게 쿨할 수가 없었지. 나라면 절대 못 그럴 거야. 엄청 질척대면서 인정과 성과에 집착하겠지.  



두려워하는 감정을 두려워하는 것


<우리도 사랑일까> 스틸컷


마지막 편지에서도 영화 이야기를 해볼게. <우리도 사랑일까>라는 영화가 있어. 미셸 윌리엄스가 연기한 마고는 무언가 두려워하는 감정을 두려워해. 마고는 두 다리가 멀쩡하지만 휠체어를 탄 채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 공항 환승 구간을 지나가. 마고는 말해. 비행기 갈아타는 게 무섭다고. 잘 모르는 곳을 이곳저곳 뛰어다니고 시간 안에 갈 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도 겁난다고. 그러자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대니얼(aka. 불륜남)이 물어봐.

“비행기도 놓치고?”
“아뇨. 그건 괜찮아요. 비행기 놓치는 건 두렵지 않아요.”
“그럼 뭐가 두려운 거죠?”
“비행기 놓칠까 봐 걱정하는 게 두려워요. 사이에 끼어서 붕 떠 있는 게 싫어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감정이 제일 두려워요.”

두려워하는 감정을 두려워하는 것. 중간에 붕 뜬 상태가 겁나는 것. 영화를 보면서 마고가 나랑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 나도 여행 가기 전, 비행기가 그냥 안 떴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 차라리 하늘 위에 떠있을 때는 괜찮아. 추락하면 어차피 죽겠지 뭐. 오히려 비행기 시간을 맞추고 이륙을 기다리는 과정이 불안하고 초조해.  

두려워지는 상태가 두려워서,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싫어서, 나도 뭔가에 쉽게 풍덩 하고 빠져들지 못해. 이리 재고 저리 재고 나만의 안전망을 만든 다음에야 비로소 몸과 마음이 움직여. 그래서 늘 몸에 힘이 들어가 있나 봐.

얼마 전 두 번째 퇴사를 하고 창업을 준비하다 심한 번아웃이 왔어. 사이드 프로젝트로 하던 일로 창업을 하려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더라. 오랜 고민 끝에 회사 그만두고 시작하는 일이니까 100% 역량을 투자해야 할 것 같고, 수익 낼 수 있는 사업 모델 만들어야 할 것 같고, 조직문화도 제대로 만들고 싶고, 브랜딩도 마케팅도 잘하고 싶었어. 콘텐츠는 말해 뭐해.

눈앞에 닥친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다가오지 않은 불확실성을 걱정하며 완벽에 완벽을 기했어. 레퍼런스 찾고 회의하고 문서를 만들수록 이상하게 불안은 더 커졌어. 그러면서 욕심 내서 다른 작업도 병행했어. 몸이 나가떨어질 수밖에. 나도 너 못지않은 저질 체력이잖아.

몸도 마음도 무너지는 번아웃을 또 겪고 나니까 내가 뭘 해야 할지, 나와 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깊게 고민됐어. 왜 일만 하면 일이 곧 내가 되어버리는 건지, 가볍게 뭔가를 하는 게 안 되는 건지,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건지. 자괴감이 몰려왔어.

가장 괴로울 때는 아이, 남편과 함께 있어도 머릿속을 자꾸만 일이 점령할 때야. 일과 함께 가족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축이야. 결국은 아이, 남편과 함께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 일을 하는 거잖아. 그런데 일에 몰입할수록 계속 남편과 아이가 걸림돌처럼 느껴지더라.

이 고민을 가만히 듣던 지인이 이렇게 말하더라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못 하잖아요.”

맞아. 그렇다고 푹 쉬는 것도 나는 못하는 사람이야. <슈퍼 거북>보다는 <슈퍼 토끼>에 가까운 사람. 달려야 만 하는 사람. 나도 참 내가 힘들어.



달리지 않는 토끼


"달리지 않는 세계 최초의 토끼가 되자!"


니 편지를 읽고 <슈퍼 토끼>를 다시 읽었어. ‘달리면 끝장’이라고 머리에 띠를 두른 토끼라니(심지어 이름이 ‘재빨라’야). 토끼가 뛰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는 타인의 시선 때문이었어. 또다시 실패하는 게 두려워서 또다시 웃음거리가 되는 게 무서워서 아예 뛰지 않기로 한 거야.

하지만 아무리 뛰지 않으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도 토끼 머릿속은 온통 달리기 생각뿐이야. 뛰는 건 토끼의 본능이니까. 토끼는 뛰어야 행복하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토끼는 자신도 모르게 달리고 있어. 숨이 턱에 닿도록 헉헉 대면서. 오로지 달리는 행위에만 집중해.


두 눈 가득 파란 하늘, 싱그러운 풀냄새, 살랑대는 바람, 세차게 뛰는 심장. 행복해하는 토끼의 얼굴을 보면서, 내가 왜 지속가능하게 일하고 싶은 여성들을 위한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었는지 생각해 보게 됐어. 무엇이 내 가슴을 그토록 뛰게 했는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돼서 내가 진짜 놓치고 있는 게 뭔지.

2년 전 마더티브 사업화를 고민했다 접었을 때도, 이번에 퇴사 후 창업을 준비하면서도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상태를 못 견뎠던 것 같아. 하루빨리 인정받고 하루빨리 성과를 내고 싶었어. 그러려면 나를 갈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니 지쳤지. 일과 엄마라는 이름 사이에서 방황했어.

새롭게 뭔가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빈틈을 견뎌야 해.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 이곳과 저곳 사이에 붕 떠 있는 상태를 말이야. 머리로는 분명히 아는데 자꾸만 빈틈이 무서워 몸을 움츠리게 돼. 여기까지 안전지대, 자꾸만 선을 긋게 돼. 그러면서 또 달리고 싶은 마음이 꿈틀대.

주영아, 요즘은 그런 생각해. 불확실성과 불안을 감당하며 몸을 풍덩 하고 던지는 게 내게 너무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일단 발이라도 담가보면 어떨까. 처음에는 발, 그다음은 무릎, 그다음은 허벅지. 조금씩 차근차근 가볍게. 선을 넘는 게 안 되면 선 밟기라도. 내게 맞는 속도를 찾아보려 해.


이러다 또다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번아웃이 올지도 몰라. 익숙하고 안전한 일을 찾아 떠날 수도 있고. 뭐, 그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니까. 일단은 눈앞의 즐거움에 몰두하고 싶어. 그동안 충분히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그런 시간 정도는 내게 줘도 괜찮을 것 같아.

참, 다시 퇴사했다니까 엄마가 그러더라. 우리 딸은 언제 성공하냐고. 엄마가 말하는 성공은 이번 생엔 이미 어려울 것 같아. 한 손에는 일을, 한 손에는 삶의 손을 잡고 달려봐야지. 또 일을 벌이면서.

-10월 28일 교환일기 마무리 기념 쫑파티 고민하는 현진


현진, 주영 두 여자가 쓰는 교환일기 [엄마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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