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 나들이
마감을 마친 금요일 아침.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환기 미술관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몸을 일으키기
어렵다. 아이와 남편이 떠난 집. 소파에 누우니 이대로 무덤까지 들어갈 기세다. 물론 손에는 스마트폰을 쥐고.
겨우겨우 몸을 세워 버스 타러 가는 길. 잠시 고민했다. 그냥 카페 가서 책 읽고 글 쓸까. 아니야. 오늘은 미술관에 가자. 버스를 타고 경복궁 가는 길, 씨네큐브가 보이자 또 고민. 상영표를 보니 지금 내리면 <우연과 상상>을 볼 수 있다. 내릴까 말까. 그냥 계속 버스를 타고 간다.
책 읽고 영화 보고 글 쓰고. 내게 너무나 편하고 익숙한 일이다. 널부러져서 스마트폰 들여다 보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오늘은 그 편하고 익숙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버스를 갈아 타고 부암동으로 갔다. 오전 11시가 넘었는데 아직 커피를 못 마셨다. 커피를 마시며 최은영 작가의 <애쓰지 않아도>를 읽었다.
이번 소설집은 단편소설보다 짧은 엽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최대한 애쓰지 않고 가볍게 쓰려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면 마음이 아려서 책장을 몇 번이나 덮었다 열었다 했는데 이번 소설집은 힘을 빼고 읽을 수 있었다. 어긋나고 엇갈린 관계에 대한 글을 읽으며, 유효기간이 이미 끝나버린 관계들을 떠올렸다. 다시는 연락할 일도 볼 일도 없겠지만 불쑥불쑥 떠오르는 얼굴들을. 책 좀 보다가 창밖에 넘실대는 초록 나무 좀 보다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좋아서 계속 있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나가야겠다.
카페 밖으로 나와 미술관으로 걸어갔다. 평일인데 제법 사람들이 있었다. 미술관은 듣던 대로 소박하면서도 단정했다. 미술관 개관 30주년을 맞아 ‘미술관 일기’라는 제목으로 미술관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작품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김환기 화백 그림의 뒷면을 볼 수 있도록 설치해 놓은 작품이 있었다. 캔버스의 뒷면, 그러니까 그림의 초안과 캔버스 앞면에 있는 최종 그림이 전혀 달랐는데 작품 설명을 보니 이미 그린 그림을 뒤엎고 다시 그린 작품이라고 했다. 글로 치자면 초고와 완성글을 동시에 보는 경험이 낯설고 묘했다. 초안과 완성작 사이, 얼마나 많은 번뇌가 있었을까.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늘 나를 사로잡는 것은 뒷이야기다. 미술관에 와서도 작가의 말이 적힌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다. 본관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갈 때 볕이 잘 들어서 좋았다. 작품이 작품만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공간도 함께 작품이 된다. 흐린 날에 오면 어떨지 궁금했다.
김환기 화백의 아내 김향안 평론가가 남긴 글이 인상 깊었다(미술관 곳곳에 있는 ‘미망인'이라는 표현은 바꾸면 좋겠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 안 나지만 미술관을 건립하는 데 20년이 걸렸는데 미술관을 준비하는 시간도 미술관의 시간에 포함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김향안은 "나만의 기록이 될 수도 있고 만인의 기록이 될 수도 있"기에 "미술관 일기를 계속한다"고 했다. '나만의 기록'이었던 시간이 지금 내 눈 앞에 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 불안했다. 욕심이 없다 말하면서도 내가 아무것도 아닐까 벌벌 떨었다. 이제는 잘 모르겠다. 성취감과 인정욕구에 중독돼 끊임없이 뭔가를 계속 했던 시간 동안 과연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었을까. 내가 무언가쯤 되는 사람이라고 착각했던 건 아닐까.
요 며칠 땅속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무기력을 느꼈다. 오늘만큼은 익숙함에서 벗어나 내가 나를 끄집어내서 밝은 햇살을 쬐게 하고 시원한 바람도 쐬게 하고 싶었다. 부암동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다. 나오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