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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un 08. 2022

적당히, 대충, 피아노

잘하지 않아도 되는 기쁨에 대해

퇴사 후 오랜 버킷리스트였던 피아노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하루는 집 근처 피아노 교습소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또 하루는 교습소에서 운영하는 연습실에서 혼자 연습을 한다.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마음에 물기가 생긴다.


초등학교 6년 내내 피아노를 배웠다. 그 시절 대부분의 아이들이 한 번씩은 피아노를 배웠으니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계속 피아노를 배울 정도로 재능이 있지도 않았다. 피아노를 그만둘 때 나보다 더 아쉬워했던 사람은 엄마였다. 가난한 집 딸이었던 엄마는 집안에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가 듣기 좋다고 했다. 딸이 치는 피아노는 엄마의 자랑이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엄마는 내게 피아노를 쳐보라 했다.


집에서 피아노를 칠 때면 긴장됐다. 엄마 아빠에게 멋진 연주를 들려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다른 집 사람들도 다 듣게 되리라는 부끄러움이 더해졌다. 학원을 그만둔 후로는 실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점점 피아노를 치지 않게 됐다. 작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커다란 피아노를 볼 때마다 부채감을 느꼈다.


중학교 2학년 때쯤이었나. 왜 피아노를 치지 않냐고, 6년씩이나 피아노 배운 게 아깝지 않냐고 말하는 엄마와 크게 싸웠다. 나는 이제 피아노가 싫다고, 저 피아노 갖다 팔라고 화를 냈다. 집에 피아노만 없으면 피아노 치라는 소리 들을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 딸에 그 엄마일까. 어느 날 집에 와보니 피아노가 없었다. 텅 빈 방을 보며 피아노가 얼마나 컸는지 새삼 실감했다.



이래서 내가 피아노를 좋아했지 


피아노 연습실에서@홍밀밀


20여 년 만에 피아노를 다시 쳤을 때 깜짝 놀랐다. 그토록 오래 피아노를 치지 않았는데 손이 피아노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선지에서 계이름을 확인한 다음(낮은음자리표 찾는 데 한참 걸렸다) 떠듬떠듬 오른손을 연습하고 왼손을 연습하고 양손을 함께 쳤다. 몇 번씩 반복할수록 듣기 편한 멜로디가 나왔다. 그래, 피아노가 이런 거였지. 두 손으로 건반을 눌러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시간을 내가 참 좋아했지.  


성인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경험이 많은 선생님은 악보 보는 법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피아노를 알려줬다. 못갖춘마디, 크레센도, 스타카토, 4분의 3박자, 파샵. 잊고 살았던 용어들이 나올 때마다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너무 오래 쓰지 않아서 녹슬어 버린 줄 알았는데 몸에 새겨진 경험은 의외로 뿌리가 깊었다.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악보에 음표마다 한글로 계이름을 써뒀던 기억, 동그라미를 여러 개 그려 놓고 연습이 한 번 끝날 때마다 선을 그었던 기억, 연주가 틀릴 때마다 선생님에게 볼펜으로 손톱을 맞던 기억도.

 

서른아홉이 되어 만난 선생님은 칭찬에 매우 후했다. 연주가 끝나면 “너무 잘하시는데요!””완벽해요!” 칭찬과 함께 어떤 점이 좋았는지, 어떤 점을 보완하면 좋을지 차분히 알려줬다. 지적을 할 때도 “이건 현진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선생님은 손목이 아니라 손가락에 힘을 주고 건반을 쳐야 손목도 아프지 않고 더 정교하게 음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도 늘 들었던 이야기인데, 나쁜 버릇조차 몸에 계속 남아 있는 게 신기했다.



적당히 해도 즐거울 수 있구나 


피아노를 배우며 나는 열심히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수업 시간 동안 집중하고, 연습은 다음 수업 하루 이틀  벼락치기로  1시간만 한다. 연습 시간 동안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못해도, 원하는 만큼 연주가  나와도 거기서 멈춘다.


사실 나는 적당히, 대충이 잘 안 되는 사람이다. 안 하면 안 했지 일단 하면 집요하게 최선을 다 한다. 꽤 오랫동안 내게는 아주 열심히 하거나, 아예 안 하거나. 두 영역만 존재했다.


피아노를 다시 배울 때도 당연히 처음에는 인정 욕구의 화신답게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잘하려면 열심히 해야 했다. 일주일에 몇 번씩 연습실에 갔다. 연습 영상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가족들에게 보여줬다. 여전히 많이 어설프지만 내가 이렇게 피아노를 친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인스타를 그만뒀기에 망정이지 인스타를 계속했다면 분명 수시로 영상을 올렸을 것이다.


전자 피아노를 살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럼 연습도 더 자주 할 수 있고 아이에게도 엄마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아이도 피아노에 관심을 갖지 않을까. 나는 또 욕심을 내고 있었다. 잘하고 싶은 욕심, 인정받고 싶은 욕심.


피아노에 대한 욕심이 사라진 건 코로나 덕분이었다. 한 번은 선생님이 가르치는 학생이 확진돼서 또 한 번은 나와 가족들이 확진돼서 그다음에는 선생님이 확진되면서 매주 하던 수업이 뜨문뜨문 진행됐다. ‘너무 오랜만에 쳐서 어쩌지',‘연습을 많이 못 해서 어쩌지’ 하며 수업에 들어갔는데 웬걸, 수업을 따라가는 데 크게 지장이 없었다. 잘 못하는 부분, 헷갈리는 부분은 선생님과 함께 반복해서 연습하면 됐다.


물론 내가 열심히 연습했다면 더 진도가 팍팍 나갔겠지만 적당히, 대충 해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연습했을 때보다 마음이 훨씬 편했다. ‘열심히 하지 않아도, 잘하지 못해도 즐거울 수 있구나.’ 내게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피아노를 다시 배우기로   드레스 입고 대회에 나가고 싶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연주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피아노를 다시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처럼 느리게 꾸준히 계속 배우고 연습하면 나중에는 선생님 도움 없이도 혼자 악보를 해석해서 피아노를   있지 않을까. 머리 하얀 할머니가 돼서도 내가 좋아하는 한두  정도는 자유롭게 연주할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일이 잘하고 싶은 일이 됐을 때 어느 순간 좋아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잘하고 싶은 욕심만 남게 되는 경험을 자주했다. 그럴 때면 마음이 딱딱하고 퍽퍽해졌다. 나는 피아노를 잘 치는 게 아니라 오래 즐겁게 치고 싶다. 오래 좋아하기 위해 열심히 하지 않는다. 욕심이 끼어들지 않도록 경계한다. 좋아하는 마음이 좋아하는 마음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마음이 말랑말랑하게


어린이집 공동 텃밭 @홍밀밀


요즘 텃밭을 가꾸고 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작은 텃밭을 분양받아 상추, 파, 감자, 당근, 옥수수 등을 심었다. 땀 흘리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수확을 하고 있으면 마음에 물기가 생긴다. 피아노를 칠 때처럼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집에 있다가도 텃밭은 잘 있을까 자꾸 생각난다.


얼마 전 남편과 아이와 함께 나들이를 갔다 오는 길에 텃밭에 들르기로 했다. 조수석에 앉아 남편에게 말했다.


“피아노를 칠 때는 잘하지 않아도 돼서 좋아. 잘해야 하면 열심히 해야 하고 열심히 하면 또 기대하게 되잖아. 그런 게 없어서 좋아. 그냥 이것 자체를 즐기는 거지. 텃밭도 비슷한 거 같아. 이걸 만약에 우리 혼자 하거나 일로 했으면 엄청 집착했을 텐데. 다 같이 하고 또 꼭 잘되지 않아도 되니까 즐거운 거잖아.”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좋아하는 일은 그래야 하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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