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귀영화는 다른 게 아니고
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제주공항에서 숙소 가는 길,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를 보며 백수가 됐음을 실감했다. 해야 할 일도 내 일을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니 신경 써야 할 일도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도 없었다. 진짜 휴가였다.
지난해 이맘때 제주 휴가가 생각났다. 휴가 가기 전 이미 벌여둔 일을 처리하느라 수시로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열었다. 하루는 캠핑장에서 슬랙에 접속하려 하자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답답하고 쿵쾅댔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연료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걸. 바다를 보며 감탄보다 한숨이 먼저 튀어나왔다.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다가도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게 두려웠다. 서울에 돌아가는 게 무서웠다.
꽤 오랫동안 휴가를 가도 온전히 쉬지 못했다. 미처 마무리 못한 일, 갑자기 처리해야 할 일을 하고 있으면 꼭 필요한 사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 급한 일이 없는데도 괜한 불안함에 SNS와 업무 창을 기웃거리며 멍하니 스크롤을 내렸다. 실제로는 쉬는 것 일하는 것 어느 것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면서 쉬면서 일도 놓지 않고 있다고 착각했다. 일과 나를 잠시도 분리하지 않는 게 프로페셔널하다 믿었다.
이번 여행은 5박은 캠핑, 4박은 숙소에서 지내기로 했다. 숙소 예약 이외에는 별다른 일정을 잡지 않았다. 꼭 가고 싶은 곳도 꼭 하고 싶은 것도 꼭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중간에 장염에 걸려 그 좋아하는 맥주, 커피도 마시지 못했다. 무욕의 여행이었다.
그날그날 마음 내키는 대로 행선지를 정했고 차를 타고 가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멈췄다. 처음으로 제주에서 전동 바이크를 탔고 덜덜 떨며 빗길에서 자동차 운전도 했다. 제주도는 운전하기 쉬운 곳이라는데 초보 운전자에게 처음 가는 길은 다 어렵더라. 그래도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운전 배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숙소에 있는 길고양이들에게 처음으로 먹이도 줘봤다. 서른아홉이 되어 처음 해보는 게 참 많다.
첫 번째로 간 캠핑장 옆 사이트에는 우리처럼 아이와 함께 온 가족이 있었다. 초등학생 정도 되는 남자아이와 유치원생 같아 보이는 여자 아이 그리고 엄마 아빠. 캠핑을 하는 2박 3일 내내 옆 텐트 엄마는 첫째에게 계속 화를 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엄마가 어떤 표정인지 알 것 같았다. 이미 화가 목 끝까지 찰랑찰랑 차있어 조금만 툭 건드려도 쉽게 넘쳐버리는 상태. 아이는 그저 놀고 싶어서 장난을 치는 것 같은데 엄마에게는 아이와 함께 놀 수 있는 에너지가 없어 보였다. 아이에게 그만하라는 이야기만 신경질적으로 반복했다. 아빠는 성실하게 텐트를 정비하고 설거지를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엄마를 보며 지난해 내 모습이 떠올랐다. 창업에는 출퇴근이 없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영상을 틀어주고 나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영상을 끄면 아이가 놀아달라 했고 내게는 아이와 놀아줄 여유가 없었다.
아이와 노는 것보다는 일이 훨씬 재밌고 보람 있었다. 분명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뒤돌아 보면 이만큼 일이 또 쌓여 있었다. “엄마 이것만, 이것만 할게”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그렇다고 영상을 계속 보여주는 건 죄책감이 들었다. 6살 아이에게 너는 왜 혼자 못 놀고 계속 놀아달라고 하냐고 화를 냈다. 그러면서 또 죄책감을 느꼈다. 다른 사람을 관찰하니 예전의 내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저 엄마는 지금 괜찮은 걸까.
일을 그만둔 이유가 아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해 말 퇴사를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다. 창업을 결심할 만큼 하고 싶었던 일이고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기에 계속하려 한다면 할 수 있겠지만 내가 행복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일이 주는 효능감은 마약 같았다. 좀처럼 채워질 줄 몰랐다. 일을 책임감 있고 완벽하게 있게 해낼 자신은 있는데 이 일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일이 곧 나였던 삶에서 일을 빼본다면 어떨지 궁금했다. 바다에 몸을 맡기듯 나를 한 번쯤 내버려 두고 싶었다. 80살까지 산다고 생각하면 1년 정도는 그런 시간을 내게 선물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1년보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고.
6월 제주는 수국으로 가득했다. 후줄근하지만 편한 옷을 입고 아이와 함께 산수국과 산딸기를 찾아다녔다.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바다와 숲을 즐겼다. 사진은 별로 찍지 않았다. 퇴사 후 인스타그램을 비활성화했다. 인스타용 사진을 찍을 때면 지금 이 순간보다 인스타그램에 보여지게 될 나를 의식하게 됐다. 눈앞에 있는 풍경이 아무리 멋져도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사진에 잘 안 담기면 별 볼 일 없게 느껴졌다. 인스타 사진 찍기를 그만두자 ‘남에게 보여지는 나’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사실 이번 여행을 오기 전 습관처럼 노트북을 챙겼다. <나를 키운 여자들> 연재 원고를 마감하려 했다. 열흘 동안 글 하나 정도는 마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를 구슬렀다. 오기 전까지 글감을 모으고 구성을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두 가지가 동시에 잘 안 되는 사람이다. 원고를 쓰는 순간 나는 이곳에 몸만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일에 몰입은 해야 하고, 가족과 시간도 보내야 하고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될 것이다. 비 내리는 캠핑장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가만히 바라보다 노트북을 집어넣었다. 한 주 정도 연재가 늦어진다고 큰일이 나지 않았다. 쉴 때는 쉬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려 했다.
아이의 만 6살 생일, 다랑쉬 오름 옆에 있는 아끈 다랑쉬 오름에 올랐다. '아끈'은 제주어로 '작은'이라는 뜻이다. 이 길이 맞나 싶은데 이미 다른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역력한 오르막길을 풀숲을 헤치며 걸었다. 10분쯤 올라갔을까. 아끈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금세 정상이 나왔다. 갈대숲 사이를 세 식구가 함께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 적당히 기분 좋은 바람. 남편은 스마트폰으로 '두 번째 달'의 음악을 틀고 영화 <마더>의 김혜자처럼 춤을 췄다. 아이는 아빠를 향해 뛰어갔다.
“부귀영화는 다른 게 아니고, 그냥 마음에 거슬림이 없는 상태예요. 사람들은 마음에 거슬림이 없을 때 보통 자각하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저처럼 예민하고 마음에 부침이 많은 사람에겐 그런 순간이 굉장 찰나예요. 아주 희귀해요. 그래서 자각할 수 있어요. 그 순간이 얼마나 좋은지.”
- <창작과 농담>(이슬아 지음) 김초희 감독 인터뷰 중에서
아이와 남편이 손을 잡고 앞장서 걷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천천히 걸었다. 과거에 대한 미련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이 자연과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만 있는 순간.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만든 김초희 감독이 이슬아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던 “마음에 거슬림이 없는 상태”가 이런 건가 싶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일을 하지 않아야 이런 평온함이 가능한 건가 씁쓸했다. 나는 일을 하면서 평온할 수 없는 사람일까.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는 마흔까지 영화 찍는 일만 하다 타의에 의해 일을 그만두게 된 영화 프로듀서 찬실이 나온다. 영화가 곧 삶이었던 찬실은 여백의 시간을 보내면서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라고, “그안에 영화도 있어요”라고 말한다. 김초희 감독은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아무 욕심 없는 이 시간을 통과하면 나는 어떤 사람이 돼있을까. 확실한 건 지난해보다 훨씬 숨쉬기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