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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Nov 10. 2022

하늘공원 썬캡 언니들

지나 봐야 알아, 지나 봐야 

아이 어린이집 친구들이 하원 후 집에 놀러 왔다. 돈가스를 야무지게 먹은 7살 세 녀석은 샤인 머스켓을 들고 방에 들어가 뮤직비디오 촬영을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날날이는 아이패드 두 대를 가지고 한 대로는 음악을 틀고, 한 대로 영상 찍기에 푹 빠졌다(덕분에 내 아이패드에는 정체불명의 영상이 가득하다). 처음에는 뮤직비디오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장르가 영화로 바뀌었다. 제목은 ‘아름다운 부부'. S는 아내, Y는 남편, 날날이는 감독이다. 고백과 운전과 심폐소생이 뒤섞인 스토리가 전개된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영상 찍으며 깔깔, 자기들이 찍은 영상 보며 또 깔깔. 세 녀석이 쪼르르 거실로 나오더니 내게 영상을 보여주면서 숨이 넘어갈 듯 웃는다. 


저렇게 웃다가 어디 잘못되는 거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신이 난 아이들을 보면서 하늘 공원에서 만난 ‘언니들'을 떠올렸다. 히키코모리 생활 10개월, 슬슬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때 S님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찌찌뽕. 안 그래도 나도 더 추워지기 전에 등산 가자고 말하려 했는데. H님도 초대해서 함께 하늘 공원에 가기로 했다. 1년 만에 재소집된 단톡방 이름은 ‘번개 등산'. 


등산인데 왜 하늘공원에 갔냐고 묻는다면 지난해 북한산 등산의 매운 기억 때문이다. 등산을 자주 가는 S님은 분명 산책하듯 갔다 올 수 있다고 했는데 길을 잘못 든 건지 우리 체력이 잘못된 건지 돌산을 올라가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내려올 때는 정말로 길을 잘못 들어서 담을 넘기까지 했던 잊을 수 없는 등산이었지만 그 후로 북한산 이야기만 들어도 겁이 났다. 이번에는 정말로 산책하듯 오를 수 있는 하늘공원에 가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올라가고 내려오는 시간보다 정자에 앉아 억새를 바라보면서 도시락 먹으며 이야기 나눈 시간이 훨씬 길었다.  


하늘공원에 갔는데 남은 사진은 이거 한 장@홍밀밀


나는 김밥을, S님은 빵을, H님은 남편이 만들어줬다는 볶음밥을 싸들고 왔다. 과일까지 더하니 그럴듯한 한상이 차려졌다. 페미니즘과 글쓰기라는 공통분모로 이루어진 조합이니만큼 분노하고 공감하며 열띤 대화가 이어졌다. 여성들뿐만 아니라 아이도, 남편도 돌봄 노동의 기쁨을 누리며 서로가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썬캡을 쓴 여자 셋이 우리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아줌마보다는 할머니에 가까울 것 같은 세 여자가 주섬주섬 도시락을 꺼내는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직접 쪄온 떡, 고구마 묵, 찰밥까지. 정성 가득한 주전부리가 ‘오다 주웠다' 느낌으로 푸짐하게 도시락통에 들어 있었다. 여자들은 아가씨보다는 아줌마에 가까운 우리를 “젊은 언니들”이라 부르면서 음식을 나눠줬다. 도시락의 면면을 보며 놀라는 우리에게 여자들은 말했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생전 처음 먹어보는 고구마 묵은 쫀득했고 특히 양념장이 기가 막혔다. 김밥을 많이 먹은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냥 받기만 할 수는 없어서 우리도 S님이 유명 빵집에서 사 왔다는 빵을 나눴다. 


그 후로 옆 자리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다(우리 이야기하느라 너무 바빠서). 셋이서 깔깔대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썬캡 언니들 중 한 명이 흐뭇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아우. 옛말에 소똥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을 때라 그러더니, 
우리 언니들이 딱 그렇네.” 
“네? 저희가요? 저희도 안 젊은데...”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언니가 하는 말.  


“지나 봐야 알아. 지나 봐야.” 


식사를 마친 썬캡 언니들은 “젊은 언니들, 재밌게 놀아"라는 말을 남기고 정자를 떠났다. 언니들이 사라진 후에도 “지나 봐야 알아, 지나 봐야"라는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나도 썬캡 언니들 나이쯤 되면 지금 내 나이 정도 되는 여자들을 아련한 얼굴로 바라보게 될까.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가볍게 프리랜서 에디터 일을 하고 있고 곧 책이 나올 예정이고 한 달간 미국에 갔다 왔고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는 대답을 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그동안'을 말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떠나면 집은 온통 내 차지가 된다. 저녁에 아이가 돌아오면 금세 다시 어질러질 집을 신경 써서 치우고, 창문을 열어놓고 화분에 물을 주고, 거실에 있는 식탁 겸 책상에 앉아 책이 될지 아닐지 모를 글을 구상하고, 오후 2시쯤 개천 산책을 하며 단풍 구경을 하다 책을 읽고, 오후 6시쯤 아이와 손을 잡고 수다를 떨며 함께 하원을 하고, 일주일에 몇 번은 잔뜩 긴장한 어깨로 차를 운전해 아이 친구들을 데려오고, 세 식구 둘러앉아 끝말잇기 하며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잠들기 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며 오늘 하루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예전의 나라면 전혀 생산적이지 못하다 생각했을 시간을 보내면서 지금 이대로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일이 최우선 순위였을 때는 일 이외의 모든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면, 이제는 일에 매몰돼 놓쳐버린 시덥지 않은 일상이 아쉽다. 스스로 정한 안식년이 끝난 후 무슨 일을 어떻게 하게 될지(혹은 더 쉬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지금은 지금을 살고 싶다. 썬캡 언니들 말처럼 지금이 딱 좋을 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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