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굿이 아니어도
군산에 간 이유는 간장게장 때문이었다. 지난 주말 <나 혼자 산다>에서 박세리가 간장게장 먹는 모습을 보고 바로 서울에 있는 간장게장집을 검색했다. 몇 년 전 꽤 맛있게 먹었던 공덕의 모 간장게장집 정식 1인분이 45000원. 언제 가격이 더 올랐지? 다른 곳도 간장게장만 전문으로 하는 곳은 정식 1인분에 4만 원이 넘었다. 이 돈을 주고 간장게장을 먹으러 갈 것인가 고민하고 있는데 남편이 말했다. “우리 그냥 군산 갈까?”
우리가 좋아하는 군산 간장게장집을 검색했다. 정식 1인분에 28000원. 뭐야 훨씬 싸잖아. 기름값, 숙소비 등 생각하면 어쩐지 돈이 더 드는 것 같긴 했지만 이미 입에는 침이 가득 고여있었다. 고슬고슬한 돌솥밥, 비리지도 짜지도 않은 간장게장, 정갈한 반찬, 딱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친절한 서비스까지. 갈 때마다 우리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던 식당이었다. 바로 그다음 주로 숙소를 예약했다. 금요일에 남편 퇴근 후 아이를 태워서 군산으로 향했다.
프리랜서 일 때문에 출장은 자주 갔지만 세 식구가 같이 차를 타고 멀리 가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신기하게도 우리 부부의 중요한 대화는 8할이 차 앞 좌석에서 이루어진다. 커리어에 대한 고민, 관계에 대한 고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 대화가 이어졌다. 이런 시간을 갖지 못해서 우리가 그동안 우울했나 싶었다. 쭉 뻗은 고속도로만 봐도 숨통이 트였다.
날이 추워진 후 한동안 무기력한 시간을 보냈다. 안식년 1년이 끝나가면서 슬슬 다시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조직에 들어갈 것인지, 프리랜서 일을 더 늘릴 것인지 고민했다.
이런 내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예상치 못했던 몇몇 고마운 제안을 해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내리더라도 완전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자꾸만 찾아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기어코 빈틈을 찾아내고 빈틈을 메우기 위해 용을 쓸 것 같았다.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그 끝에는 허무가 있었다. 얼마 전 다녀온 김세희 작가의 <프리랜서의 자부심> 북토크에서 그런 질문을 했다. 이제는 ‘그렇게까지’ 일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까 그럼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까지’ 열심히 진심을 다해 일했던 건 다 뭐였을까 허무해진다고. 모든 것을 바쳐야 할 정도로 일이 내게 중요하지 않은 거라면 그럼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회의하게 된다고.
열심과 진심을 다해 뭔가를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도, 열심과 진심을 다하지 않고 뭔가를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도 두려웠다. “올 굿이 아니어도 굿일 수 있다”(<프리랜서의 자부심>)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올 굿”이 아닐지 모를 빈틈을 떠올렸다. 또다시 일 때문에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게 될까 겁났다.
서산 휴게소까지 남편이 운전하고 군산 숙소까지는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휴게소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숙소에 있는 커다란 TV로 <나 혼자 산다> 본방을 보면서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며 웃었다(집에는 TV가 없어서 세 식구가 아이패드로 예능을 본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의 작은 에어비앤비인데 일상을 벗어났다는 감각만으로 마음이 휙 풀어졌다. 내가 치우거나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남의 공간이 주는 해방감. 그동안 너무 집에만 있어서 우울했던 걸까.
다음 날 오전, 이성당에 들렀다 근대화 거리를 걷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늘게 내리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세차게 내렸다. 머리 위에 눈이 수북하게 쌓이고 발이 푹푹 빠질 정도였다. 서둘러 간장게장 집으로 향했다. 4년 만에 찾았는데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알이 꽉 찬 간장게장을 입에 콱 무는 순간, 눈길을 뚫고 여기까지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새 훌쩍 큰 아이는 간장게장에 밥을 비벼 마른 김에 싸서 밥 한 그릇을 뚝딱했다. 역시 간장게장은 군산이야! 남편과 대만족의 쌍따봉을 날렸다.
뜨끈한 누룽지까지 먹고 밖으로 나오니 바깥이 온통 하얬다. 박물관이 리모델링 중이라 근처 카페로 갔다. 창밖에 쏟아지는 눈을 보면서 아이와 비유 놀이를 했다.
“날날아, 눈 내리는 모습이 뭐랑 비슷한 것 같아? 엄마는 막 종이를 찢어서 하늘에서 뿌리는 것 같은데.”
“음, 나는 막 벌떼가 막 떼 지어 날아가는 것 같았어”
“그리고 또? 뭐랑 비슷했어? 엄마는 땅에 눈이 막 쌓인 게 꼭 빙수 같던데. 팥 뿌려 먹으면 맛있을 것 같았어. “
“나는… 막 땅에서 청소기로 하늘에 있는 눈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어.”
“(창밖을 가리키며) 날날아, 눈 진짜 많이 온다. 저건 뭐랑 비슷한 것 같아?”
“하늘에서 조각품이 산산조각 나서 내려오는 것 같아.”
어떤 길을 가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의 기준은 과거였다. 나이가 마흔 즈음되니 이제 웬만한 길은 이미 다 겪어봤다고 생각하게 된다. 회사에 다시 가면 이런 문제가 또 생기지 않을까, 프리랜서를 하면 이런 문제가 분명 생길 거야. 아 몰라. 지겨워. 다 싫어.
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다 해봤다’, ‘다 안다’는 착각은 종종 나를 과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식상하기 짝이 없는 나의 비유와 전혀 다른 아이의 비유를 들으며, 뇌를 깨끗하게 씻어내고 싶다 생각했다. 어제의 나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경험을 처음으로 해보는 아이처럼 마음껏 감탄하고 마음껏 기대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까. 그러기엔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게 너무 많은데. 오늘 먹은 간장게장 맛도, 우리의 여행도. 잊지 않은 채로 잊으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다.
나는 상담사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올 굿은 없다. 올 굿이 아니어도 굿일 수 있다. 나는 되뇌었다. 올 굿이 아닐지라도 지금 가진 것들로 삶을 꾸려나간다. 계속해서 앞을 보고 살아간다. 지나친 심각함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안간힘을 쏟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끊임없이 기대치를 낮추고 조정하면서.
-김세희 <프리랜서의 자부심>
덧1)
지식 콘텐츠 큐레이션 플랫폼 ‘서사‘에 필진으로 참여하게 됐어요. 첫 콘텐츠로 <마흔에 읽는 니체>에 대한 글을 썼는데요. 서사 앱 다운받고 회원가입하면 7일간 무료로 읽을 수 있다고 하네요. 이 책에도 아이처럼 모든 것을 망각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덧2)
<나를 키운 여자들> 책 작업은 막바지입니다. 책 표지가 나왔고 소중한 추천사도 받았어요(추천사 받고 오열한 저자가 여기에…) 1월 중순에 출간 예정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