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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un 09. 2023

인터뷰하다 나영석 PD를 떠올리다

녹취를 푸는 시간

인터뷰 과정에서 제일 괴로운 시간은 녹취를 풀 때 아닐까. 어색하게 말하는 내 목소리를 듣는 것도 괴롭고, '여기서는 이렇게 물어봤어야 했는데''이 질문은 그냥 하지 말걸' 후회가 마구 밀려온다. 그래서 인터뷰 녹취를 풀 때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 딴짓을 정말 많이 한다(응?). 2시간 분량 인터뷰 푸는 데 곱절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나만 이런 건 아니죠. 


요즘은 음성을 인식해서 텍스트로 변환해 주는 앱이 있지만 나는 (옛날 사람이라) 100%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녹취를 푼다. 인터뷰하면서 1차로 타이핑하고, 인터뷰 끝난 후 다시 녹음 파일 들으며 녹취를 푼다. 인터뷰했던 내용을 다시 들으면서 인터뷰 원고에 꼭 들어가야 할 대목을 표시하고, 어떤 부분을 추가적으로 질문하거나 자료를 찾아볼지 체크한다. 녹취 풀 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유다. 


이 단계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인터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키워드를 무엇으로 잡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인터뷰를 다 읽고 나서 독자의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가 남았으면 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떤 캐릭터로 소개할 것인가 


등나무가 예뻤던 학교@지학사 티솔루션 뉴스레터 이민정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각 출연자마다 캐릭터를 만들고 별명을 짓는다. 이를 잘하는 사람이 나영석 PD다. 나PD가 연출한 <뿅뿅 지구오락실>을 종종 보는데 이영지는 ‘괄괄이', 안유진은 ‘맑은 눈의 광인' 등 저마다 명확한 캐릭터를 갖고 있고, 이 캐릭터를 중심으로 출연자들의 관계성과 웃음 포인트가 만들어진다. 시청자들은 각 캐릭터에서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을 떠올리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인터뷰를 할 때 이 사람을 독자들에게 어떤 캐릭터로 소개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물론 단 2시간 정도 만난 사람에 대해서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사전 취재를 하면서, 인터뷰를 하면서, 녹취를 풀면서, 원고를 쓰면서 계속해서 생각한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언어로 이 사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선생님의 B면] 세 번째 인터뷰이는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9년 차 교사 E님이다. 인터뷰 전에 E님이 간략한 이력서를 미리 보내줬는데 빽빽한 이력을 보고 한 번 놀라고, 이력의 내용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영어교사인 E님은 에듀테크를 활용한 수업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 에듀테크 활용 수업 관련 연구 활동, 컨설팅, 강의 등을 꾸준히 해왔다. 에듀테크가 뭔지 궁금해서 인터뷰 때 시연을 부탁했는데 교사가 보고 있는 태블릿 화면이 교실 칠판에 미러링 되는 것을 보고 1차로 충격(옛날 사람…), ios ‘넘버스’ 앱을 활용해서 학습 자료를 만든 것을 보고 2차로 충격을 받았다(넘버스 앱이 이렇게 활용될 수 있어?). E님이 현재 근무 중인 학교는 ios 운영체제를 활용해 수업하는 애플인증학교로 학생들이 모두 아이패드를 갖고 있다.  


하지만 충격과는 별개로 솔직히 의문이었다. 테크놀로지 활용, 시대적 흐름인 건 알겠는데 종이로 공부하는 것과 패드로 공부하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건 아닌가? E님에게 "디지털 디바이스를 활용해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E님은 "이걸 보여드릴게요"라면서 MS 팀즈에 있는 ‘리딩 프로그레스' 프로그램을 어떻게 수업에 활용하는지 보여줬다. 


학생들이 녹음 버튼을 누르고 교사가 제시한 읽기 자료를 읽으면 각 학생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데이터로 분석돼서 교사에게 전송됐다. 잘 못 읽었던 단어는 무엇인지, 분당 단어수, 읽기 속도, 정확도 등이 1학년 전체 평균과 함께 분석된 화면이 보였다. 


“저는 페이퍼도 많이 써요. 그런데 이런 과제는 종이가 아니라 디바이스를 쓸 때 더 효율적으로 수업을 할 수 있겠죠. 아이들이 과제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니터링한 다음에 교탁으로 한 명씩 부르는 거예요. ‘이런 단어가 어렵다고 나왔는데 한 번 읽어볼래?’라고요. 사람 손이 한 번 더 들어가는 거죠.”


E님은 지금의 학교에 근무하기 전 서울 1호 미래학교로 지정된 C중학교에서 5년간 근무하면서 테크놀로지 통합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다. 현재 AI 융합교육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기도 하다. 


이력서에서 느껴진 E님의 이미지는 ‘똑똑한 일잘러'였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E님이 패널로 참가한 토론회를 봤는데 마스크를 썼는데도 똑부러짐이 눈과 말투에 묻어났다. 실제로 만나본 E님은 예상했던 것처럼 야무진 인상이면서도 특유의 장난기를 갖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꾸밈없고 솔직했다. 솔직함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E님의 솔직함은 당당함에서 나오는 솔직함이었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솔직함. 


‘엄친딸' 루트를 밟아왔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E님은 초등학교 때 기본 학력 미달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하루 14시간씩 집과 PC방에서 게임만 했다고. 순간 E님이 다르게 보였다. 


E님은 한 번 뭔가에 빠지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고등학교 때는 베이킹에 빠졌고 대학교 때는 자전거에 빠져서 매일 4시간씩 새벽까지 자전거를 탔다고. 복싱에도 빠졌다가 와인과 위스키에 빠져서 집에 위스키 컬렉션이 있다고 말했다. ‘제일 좋아하는 위스키를 추천해 달라'고 하자 E님은 일본 블렌디드 위스키인 ‘야마자키 12년'을 추천했다. 


인생이 덕후인 사람이자 할머니가 돼서도 덕질을 하고 싶은 1인으로서, 하나에 빠지면 맨틀까지 파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E님의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빠진 것들에 공통점이 뭔 것 같으세요?”라고 묻자 E님은 웃으며 답했다. “없는 것 같아요.” 맞다. 무용함, 무규칙이야말로 덕질의 기본 요건이다. E님은 반찬도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먹는다고 했다. 삼시세끼 멸치볶음만 먹다가 통풍에 걸린 적이 있다는 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이의 인간다움 


@지학사 티솔루션 뉴스레터 이민정


예능에서 캐릭터가 형성되는 지점은 ‘인간다움'과 맞닿아 있을 때가 많다. 완벽해 보이는 연예인이 망가지거나 허당미를 보이거나 연예인이 아닌 우리와 그리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인간임을 확인할 때 시청자들은 경계를 풀고 출연진에게 감정 이입한다.  


인터뷰이의 인간다움을 끌어내기 위해 나는 인터뷰할 때 농담을 자주 던지고 중간중간 나에 대한 TMI를 말한다. 인터뷰어가 속에 있는 것을 꺼내 보여줄 때 인터뷰이도 편안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녹취록을 풀 때면 유난히 나의 방정맞은 웃음소리가 많이 들린다. 


사실 나는 그리 다정하거나 따뜻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인터뷰를 하는 순간만큼은 ‘이 사람에게는 어떤 이야기든 해도 괜찮다'는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사람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내 진심을 이해해 주겠구나, 내가 어떻게 말하더라도 찰떡같이 정리해 주겠구나'라는 믿음. 


인터뷰이 섭외를 할 때 예의를 갖추는 것부터 정성을 다한 사전 질문지를 보내고 인터뷰 시간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이 모든 노력이 내게는 인터뷰이와의 신뢰를 쌓는 과정이다. <지락실>에서 이영지와 안유진이 자신들보다 스무 살 이상 많은 나영석 PD에게 “영석이 형"이라고 편하게 부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을까. 


E님에게 그럼 C중학교에서 근무했던 5년은 에듀테크에 빠져 있었던 거냐고 물었다. E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때는 동료들과 함께 뭔가를 하는 것에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누가 보면 재미없고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밥 먹다가 ‘피드백이 뭔 것 같아?’‘평가는 왜 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서로 던지면서 다양한 교과 선생님들이 계속 대화를 하는 거예요. 밥 먹고 운동장을 네다섯 바퀴 돌아도 이야기가 안 끝날 때도 있었어요. 차로 왕복 4시간 걸려서 출퇴근을 했는데 정말 즐겁게 다녔어요. 처음 3년 정도는 정말 자주 야근을 했어요. ‘오늘 저녁 뭐 먹을래'로 시작해서 밤 9시 넘어서도 교무실에 있었죠. 수학 캠프 준비하는데 영어교사인 제가 같이 밤을 새우고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우리끼리 재밌어서 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일하고 공부하는 게 정말 재밌었어요. 이상하죠?(웃음)” 


오후 5시에 교실에 비쳤던 뭉근한 햇살 때문이었을까. E교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타이핑을 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퇴근을 하고도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일 이야기, 회사 이야기를 하고 다음 날 아침에 같이 해장을 하고… 일과 삶이 전혀 분리되지 않았지만 아무 상관없던 이상한 시절을 보냈던 나의 사회 초년생 시절이 소환됐다. 그때 눈물이 났던 건 마음 맞는 동료들과 함께 뭔가를 했던 즐겁고 신났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 그 시절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을까. 운동장을 돌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을 E교사와 동료 교사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E님은 자신이 했던 모든 활동의 동력은 ‘재미'라고 했다. 인터뷰에서 인터뷰이가 자주 언급하는 말은 인터뷰이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우리가 쓰는 말과 글에는 우리라는 사람이 담겨 있다. 이날 E님이 제일 많이 쓴 단어는 ‘재미'와 ‘놀이'였다. 재밌게, 놀이하듯이 교사 생활을 하고 있다고. 내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E님은 임용고시 공부하던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임용을 3번 만에 붙었어요. 너무 공부하기 싫어서 중간에 3개월 정도 출판사에서 잠깐 일했어요. 그때 멸치 볶음 먹다 통풍 걸려서 전철역 계단 올라가는 것도 힘들 때였어요. 회사에 앉아 있는데 시간이 그렇게 안 가더라고요. 출근해서 한참 일했는데 오전 9시 20분이고, 오후 6시 퇴근 시간까지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학교는, 눈 감았다 뜨면 퇴근이에요. 어찌 보면 정신없고 에너지 많이 쓰고 마음 고생할 때도 있지만 애들이랑 선생님들이랑 같이 노는 게 재밌고 시간이 빨리 가요. 그게 교사 생활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이유인 것 같아요.” 


캐릭터에 공감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다. 인터뷰를 하며, 녹취를 풀며 계속해서 의심한다. '이 말이 진짜인가.' '듣기 좋거나 멋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닌가.' 인터뷰어는 인터뷰이의 진심을 독자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다. E님의 말과 글, 표정을 보면서 재밌게, 놀이하듯이 교사 생활을 한다는 E님의 말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서사가 납작해지지 않게 


@지학사 티솔루션 뉴스레터 이민정


E님 인터뷰의 첫 제목은 ‘이렇게 ‘이상한' 영어 선생님은 처음이야'였다. “이상하죠?” 역시 E님이 자주 했던 말이었다. 일이 재밌어서 놀이처럼 했다는 것도 이상하고, 영어교사가 교과목뿐만 아니라 에듀테크, 공간혁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과 전문성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이상함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에서 이상함은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 의미다. 그래서 작은따옴표 안에 ‘이상한'을 넣었다. 


최종적으로 선택한 제목은 ‘게임덕후가 영어교사가 됐을 때'다. ‘게임'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몰입', ‘재미'라는 속성이 E님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했다. ‘게임덕후’와 ‘영어교사’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E님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인터뷰 아웃트로에 이러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교사는 지금도 게임을 하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새로운 미션을 깨면서 발전하고 성장하는 게임. 이 교사 삶의 테마는 게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판을 설계하고 다음 판, 그다음 판을 하나씩 돌파해 나가는 게임. 억지로 끌려가는 게임이 아니라 눈을 반짝이며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게임.


독자들은 인터뷰어가 해석한 인터뷰이의 편집된 모습을 읽는다. 인터뷰어로서 나는 최대한 입체적이고 섬세하게 ‘캐해(캐릭터 해석)’를 한다. 나를 비우고 편견을 걷어내고 고유한 타인을 건져 올린다. 타인의 서사가 함부로 납작해지지 않도록. 


이상하고 신기한 교사, E님과의 인터뷰 전문은 지학사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프리랜서 에디터로 일합니다. 작업 관련 문의 및 제안은 hong69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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