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의 <평생학습e음> 취재를 마치며
성경님과의 인터뷰는 두 번째였다. 성경님은 기혼 여성의 삶을 탐구하는 모임 ‘부너미' 대표다.
2020년 <포포포 매거진>에 공존과 연대를 주제로 성경님과의 인터뷰를 실었다. 당시 부너미는 11명의 공저자가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 두 권의 책을 낸 상황이었다. 인터뷰를 통해 혼자가 아닌 함께의 힘으로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담으려 했다.
책 주제를 정하고 필진을 모으고 함께 글을 쓰고 피드백하고 수정하고... 여럿이 함께 책을 내는 과정은 결코 간단치 않다. 첫 번째 책을 낼 때도, 두 번째 책을 낼 때도 공저는 이제 그만 쓰겠다 했던 성경님은 올해 초 부너미의 세 번째 책 <우리 같이 볼래요?>를 펴냈다. 이번에는 공저자가 무려 22명이다. 두 번째 책과 세 번째 책 사이 성경님은 성평등교육활동가 교육을 이수했고 현재는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똑같은 사람을 인터뷰하더라도 어떤 주제로 인터뷰하느냐에 따라 인터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번 인터뷰는 가정의 달을 맞이해 성평등한 가족문화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동안 기혼 여성들과 함께 페미니즘을 탐구하고 가정 내 성평등을 위해 분투해 온 성경님의 경험이 또 다른 기혼 여성들에게 유용한 레퍼런스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인터뷰를 앞두고 질문지를 짜면서 아는 사람을 인터뷰한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다. 6년 전, 성경님이 처음 공적 글쓰기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부너미를 결성하고 부너미가 세 권의 책을 내는 과정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누군가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의미였다. 이 사람이 누군지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 인터뷰이를 어떻게 하면 입체적이고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지 전략을 세워야 했다.
언제나 그렇듯 사전 취재부터 시작했다. 부너미가 낸 세 권의 책에 실린 성경님의 글을 꼼꼼히 다시 읽었다. 성경님이 평등교육활동가모임 ‘모들'과 함께 펴낸 <포괄적 성교육>도 읽었다. 그동안 성경님이 언론에 기고하거나 언론과 인터뷰한 글을 모두 찾아 읽었다. 성경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전에 썼던 글, 했던 말을 다시 읽으니 지난 6년간의 변화가 좀 더 선명하게 와닿았다.
우리는 한 사람의 모든 것을 한 번의 인터뷰에서 다 보여줄 수 없다. 인터뷰 시간도, 인터뷰 지면도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질문지를 짜면서 이 사람의 무엇을, 어떤 순서로 펼쳐서 보여줄 것인지 먼저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인터뷰 질문지를 만드는 것은 인터뷰의 구조를 설계하는 과정이다.
물론 인터뷰는 질문지 그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 나올 수도 있고 준비했던 질문이 무용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지만 인터뷰의 전개를 미리 고민하고 진행한 인터뷰와 그저 궁금한 점을 나열하는 인터뷰는 완결성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번 인터뷰는 크게 세 파트로 나눠 질문을 하기로 했다.
[부너미]
[가족 내 성평등]
[곁에서 세상으로]
‘부너미' 파트에서는 이번에 낸 책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부너미 활동에 대해, ‘가족 내 성평등' 파트에서는 성평등한 가족문화를 만들기 위해 성경님이 그동안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곁에서 세상으로'라는 파트 제목은 ‘곁을 바꾸는 페미니즘'이라는 부너미의 슬로건에서 따왔다. 가정 내 성평등에서 나아가 학생들과 양육자들을 대상으로 성평등교육을 하는 성경님의 현재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제목이 ‘곁에서 세상으로'라고 생각했다. 가정 내 성평등이 비단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도 함께 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마지막에 저출생에 대한 질문을 넣으면서 이것까지 물어보기에는 인터뷰 주제가 너무 방대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일단은 포함시켰다. 인터뷰이에게 미리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질문지에 나오는 질문이 모두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인터뷰이에게는 보여주지 않지만 질문지를 짤 때는 꼭 해야 할 질문과 넘어가도 괜찮은 질문을 구분해 놓는다.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인터뷰이의 답변을 듣고 그때그때 어떤 질문은 넘어가고 어떤 질문을 추가로 할지 판단하기도 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인터뷰 질문지를 짜는 것이 지도를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길로도 갈 수 있고 저 길로도 갈 수 있도록 길을 익혀두는 것이다. 물론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게 될 수도 있지만 내 손으로 지도를 그려본 경험은 모르는 길을 갈 때 도움이 된다.
질문지 발송을 앞두고 사실 조금 떨렸다. 인터뷰를 여러 번 해본 성경님이 이 질문지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업계 관계자에게 평가를 받는 느낌이랄까.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이렇게 다정하고 감동적인 질문지라니! 너무 놀랐습니다"
휴. 다행이었다.
실제로 인터뷰를 할 때는 인터뷰 질문지를 잊으려 한다. 질문지에 얽매이다 보면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터뷰이의 답변을 들으면서 어느 질문을 취하고 버릴지 선택한다. 어떤 인터뷰는 10개의 질문 중 10개에 대한 답변을 모두 들어야 이야기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인터뷰는 10개의 질문 중 1개만 깊게 들어도 충분할 수 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할 때는 초집중 상태가 된다. 끊임없이 리액션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서로 돌봄'의 가치를 말하는 두 번째 파트가 울림이 크고 이야기가 풍성했다. 이 주제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최종 인터뷰 원고에서 각 파트 제목은 아래와 같이 바뀌었다.
[부너미] 글을 쓸 때마다 삶이 변했다
[집안의 성평등1] 남편의 노동이 나를 돌본다는 느낌
[집안의 성평등2] 돌봄이 폭탄이 되지 않도록
[곁에서 세상으로] 학교로, 도로로, 멈추지 않고
인터뷰를 준비하고 진행하고 정리하면서 성경님의 지난 6년을 함께 정리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특히 돌봄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성경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자신은 빨래를 하지 않으면서 흰 빨래에 유독 집착하던 남편이 어떻게 가정에서 돌봄이 주체가 되어갔는지, 남편의 변화가 아이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듣는 대목에서는 마음이 뭉클했다.
“제가 지난주 토요일에 강의가 있었어요. 나갈 준비를 하는데 남편이 둘째랑 김장을 하는 거예요. 남편은 양념 준비하고 아들은 파랑 마늘 다듬고요. 그전에는 남편이 김장할 때 제가 같이 없으면 죄책감이 들고 미안했어요. 그런데 지난주에는 그 장면을 보면서 죄책감보다 고마움이 더 크더라고요. ‘고마워, 얼른 갔다 올게' 말하고 나갔다 집에 돌아오니까 남편이 새로 담근 김치랑 수육을 내놓는데, 죄책감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그 김치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더라고요. 10년간 남편의 살림력, 돌봄력이 많이 향상됐어요. 어떤 요리든 척척해요. 이제야 남편이 같이 사는 동반자라는 느낌이 들어요. 남편이 김치를 담그면 나는 다른 걸 하면서 분업하고, 남편이 담근 막걸리를 마시면 이 사람의 노동이 나를 돌본다는 느낌이 드니까 좋아요.”
“아이들이 성평등을 당연하게 생각해요. 저는 아이들에게 가족구성원들이 서로를 돌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어린이들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돌봄이 있어요. 가사노동도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할 수 있고, 오늘 마음이 어땠는지 가족의 감정을 돌볼 수도 있죠. 저는 아이들에게 돌봄과 가사가 습(習)이 되도록 교육을 하려 해요. 둘째는 어릴 때부터 김장에 참여하고 청소하고 빨래 개는 게 습관이 돼서 제가 빨래를 개어 주면 고마워해요. ‘엄마, 내 빨래 개어 줬네. 고마워'라고요. 9살인데 나를 돌보는 남의 노동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아는 거예요. 해마다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조금씩 더 생겨서 이제는 볶음밥도 할 줄 알아요. 남편과의 관계 변화가 아이들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끼친 거죠. 저는 돌봄에 대한 교육이 어떤 교육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제목은 이렇게 뽑았다. <유치원생부터 ‘돌봄 교육'이 꼭 필요한 이유>. 한글, 수학, 영어를 가르치는 것처럼 남자 아이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나를 돌보고 서로를 돌보는 법에 대해 어릴 때부터 가르친다면 우리 사회는 분명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다.
지난해 4월부터 1년간 진행해 온 <평생학습e음> 취재를 내부 사정상 이번달로 마무리하게 됐다. 처음 제안을 받고 취재를 할 때만 해도 평생교육, 평생학습이라는 말이 낯설었다. 그런데 전국에 있는 평생학습 관련 기관장, 실무자, 학습자들을 만나면서 평생학습이라는 것이 거창한 게 아니라 이미 우리 삶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험을 위한 공부, 취업을 위한 공부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주변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부너미'처럼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여성들과 온오프라인에서 모여서 함께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지역 곳곳에 있는 평생학습 기관에서도 관심사에 맞춰 질 좋은 강연을 들을 수 있다. 요즘 나는 온라인으로 철학 수업을 듣고 일주일에 한 번씩 춤을 배우고 있다. 새롭게 배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서 즐겁다.
일흔 넘어 처음으로 한글을 배운 할머니, 퇴사 후 귀농하고 스마트팜을 준비하는 90년대생 부부, 20년 넘게 군생활을 하다 전직을 준비하는 중년 남성, 한국에서 경찰이 되는 게 꿈이라는 아프간 초등학생, 오전에는 글을 짓고 오후에는 농사를 짓는 50대 소설가…
1년 동안 <평생학습e음>에서 에디터로 취재를 하면서 인터뷰가 아니었다면 만나기 어려웠을 수많은 인터뷰이를 만났다. 사전 취재를 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래처럼 내 안의 세계가 수없이 무너지고 깨졌다. 반갑고 기쁜 ‘붕괴'였다. 사진작가인 민정님과 서울, 경기는 물론이고 제주, 울산, 광주, 무안, 금산, 아산 등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여행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민정님 덕분에 인터뷰하는 사진이 많이 남았다. 고마워요!). 또 다른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기다리며, 지난 1년을 마무리한다.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인터뷰를 합니다. 문의 및 제안은 hong69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