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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Sep 01. 2023

일하는 '뽕'에 취하지 않는 법

'번아웃의 종말'을 읽고

새벽 5시 40분에 서울을 출발해서 지역 출장을 다녀왔다. 한 건의 미팅, 두 건의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밤 9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늘 떨려서 전날에 잠을 설쳤는데 만족스러운 인터뷰가 나와서 다행이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만.


8월 휴가를 기점으로 일이 많았다. 기존에 진행하는 인터뷰 외주에 더해 새로운 단행본 인터뷰 외주를 진행하게 됐고 디지털 마케팅 글쓰기 강연, 단건으로 진행하는 외주도 있었다. 다행히 남편이 여유가 있는 시기라(남편은 겨울에 매우 바쁘다) 남편에게 저녁 육아, 주말 육아를 맡기고 수시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인터뷰 원고를 마감하고 새로운 인터뷰 일정을 잡고 또 다른 인터뷰 질문지를 준비하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하는 뽕'에 취하지 말아야겠다고.


프로젝트를 함께하는 동료와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동료가 운전하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다). 둘 다 심각한 번아웃을 겪은 적 있고, 그럼에도 일을 하는 데서 가장 큰 효능감을 느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우리는 ‘일 많고 바쁜 나'에 취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번아웃을 훈장처럼 생각하지 말자고.


‘번아웃 북클럽'에서 첫 번째로 읽었던 책 <번아웃의 종말>에는 “우리는 대부분 뒤틀린 방식으로 번아웃 문화를 사랑한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번아웃은 부정적인 상태이지만, 수많은 이들이 그 상태를 자신에게 적용하고 싶어 한다"라고. 현대 사회 노동 윤리는 일을 삶의 중심에 놓고 일에 헌신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 때문에 소진되었다는 것은 미국의 노동 윤리 규범을 준수하는 좋은 노동자라는 뜻이다. 따지자면, 그것은 일에 무척이나 헌신한 나머지 일을 통해 스스로를 인정하는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니까.” -<번아웃의 종말> 중에서


나 역시 번아웃을 겪는 상황이 괴로우면서도 ‘내가 이만큼 열심히 일해서! 이렇게까지 힘들어졌어!'라고 인정받고 싶은 심리가 있었다. 안식년을 결심하면서도 ‘나는 번아웃이 올 정도로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까 충분히 쉴 자격이 있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안식년을 보내고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일에서 존재 이유를 찾았다.


그러다 얼마 전, 일의 실패를 경험하고 우울했던 적이 있다. ‘내가 더 열심히 했어야 했나? 내가 뭘 잘못했던 걸까?’라고 자책하다가 일이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진리를 깨달았다. 일의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요소가 개입된다. 날씨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작용하기도 하고, 나 혼자만 잘한다고 해서 최선의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실수를 하거나 제대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결과물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에도 내가 개입할 수 없는 요소가 훨씬 많다.


이처럼 복합적인 ‘일'을 오직 나의 노력이라는 잣대로만 바라본다면 나는 필연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일은 곧 내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성취, 경험도 당연히 나만의 것이 아니다.  


지난해 일을 쉬었을 때 알게 됐다. 일을 제외하고도 삶에는 수많은 기쁨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은 그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방식 중 하나라는 것을. 그럼에도 일에 몰두할 때면 자꾸만 일이 곧 나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일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일이 많아지면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일 때문에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가 하찮은 사람이 된다. 이제는 이 느낌이 ‘가짜'라는 것을 안다. 일을 하더라도, 하지 않더라도, 일을 잘해도, 못해도 나는 나 자체로 존엄한 사람이라는 것을. 


‘번아웃 북클럽' 오프라인 모임 때 한 참가자는 다음 문장을 낭독했다.


“반면 에리카 메나는 그가 키우는 고양이를 생각했다. “전 온 세상의 그 어떤 살아 있는 존재보다도 저의 고양이를 사랑해요. 그런데 고양이는 일은 하지 않지요. 말 그대로예요. 고양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고양이가 이만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면 인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또 친구들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아이들 역시 일하지 않는데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면, 저도 마찬가지이지요.”” -<번아웃의 종말> 중에서


나는 그다음 문장에 진하게 밑줄을 그어뒀다. "당신은 당신의 생산성보다 훨씬 더 큰 가치가 있다."


서울이 가까워질 때쯤 나는 운전을 하는 동료에게 말했다.


“저는 가슴이 막 답답하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느낌이 다시 오는 게 제일 겁나요. 그래서 반응에 너무 연연하지 않으려고 하고, 일하는 중간중간 일과 무관한 일을 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근육을 쓰려고 해요. 일부러 음식을 차려 먹고, 요가를 하고,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려고 해요. 그래도 다행인 건, 번아웃을 겪어봤기 때문에 ‘아 이렇게 하면 번아웃이 오겠구나'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제가 겪었던 최악의 상태가 이제는 경고등이 되어주는 거예요."




홍보1. '번아웃 북클럽'은 '번아웃 탈출 북클럽'으로 이름을 바꾸고 다음 주부터 온라인으로 새로운 책을 읽습니다. <우리는 출근하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지속가능한 '유연한 노동'이 어떻게 가능할지 고민해 봐요. 유연근무, 재택근무, 원격근무 하면서 어쩐지 일을 더 많이 하게 된 것 같은 분들이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신청은 아래에서.




홍보2. 9월 13일에 제가 쓴 에세이집 <나를 키운 여자들> 첫 북토크를 합니다. 책에서 못다 한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 들려드릴게요. 책 안 읽었어도 오셔도 됩니다. 신청은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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