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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May 15. 2024

LA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Emergency Exit] 신경을 끄면 0이 되는 마법

LA로 가는 비행기 안. 비행기 탄 지 6시간 지났으니 딱 절반만큼 왔다. 태어나 처음으로(아마도 마지막으로) 비즈니스석에 탔는데 정말 쾌적하고 편하다. 10년 가까이 마일리지 모은 보람이 있다. 비즈니스석 타면 와인도 마구 마시고 라면도 꼭 끓여달라고 해야지 했는데 웬걸, 점심 때부터 체해서 결국 쌈밥 먹다 중단하고 승무원에게 소화제를 부탁했다. 여전히 속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훨씬 낫다. 살짝 배도 고프다.


남편과 아이가 2인석에 나란히 앉고 나는 1인석 좌석에 혼자 앉았다. 아이는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아주 야무지게 챙겨 먹고 <톰과 제리>를 보다 잠들었다. 3년 전 마지막 해외여행 때만 해도 비행기에서 자다 깨다 하는 아이를 남편과 번갈아가며 보느라 한숨도 못 잤는데 이제 정말 많이 컸다. 


여행 앞두고 이사하느라 스트레스가 정말 컸다. 집 구하느라 스트레스, 집이 안 나가서 스트레스. 고금리 거래 절벽이 우리 이야기가 돼서 이렇게까지 집이 안 빠질 줄이야. 집주인이 부동산 8군데에 집을 내놨고 3개월간 적어도 20번 이상 집을 보여준 듯하다. 그때마다 약속 정하고 집 정리하고 집이 안 나갈 경우를 대비해서 법적 절차 알아보고 다음 이사 갈 집 대출 알아보고.


결국 집주인이 애초 부동산에 내놓은 가격에서 4천만 원을 내리고 도배와 일부 수리까지 하고서야 집이 나갔다. 처음에는 1억이나 전세금을 올린 집주인이 원망스러웠고, 나중에는 이사 날짜가 다가오는데 집이 안 빠지니 집주인도 우리도 함께 똥줄이 탔다. 남편이 집주인과 카톡을 엄청 했는데(절반은 정보 공유용, 절반은 하소연과 압박용) 집주인이 본인도 밤에 잠이 안 온다며 남편에게 가위를 거꾸로 세워서 신발장에 넣어두라고 조언했다고 ㅎㅎㅎㅎㅎ


더 코미디는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했다는 것. 그 후 극적으로 집이 나가긴 했는데 그만큼 가격도 내렸기 때문에 진짜로 가위가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미신에 기댈 수밖에 없는 막막함이라니. 남편은 고깃집에서 잘 드는 가위도 빌려올 기세였는데 그것까지는 안 했으니 다행인가.

 

집 계약 만료일과 여행 날짜가 겹치는 상황이라 한 달 동안 보관 이사를 하기로 했다. 집이 나갈지 안 나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짐 싸고 정리하고 버리고 당근마켓에 처분하고. 이사 후 여행까지 며칠은 또 빈집에서 보내야 하니 여행할 때 가져갈 짐, 여행할 때까지 필요한 짐 챙기고.


신경 쓸 일은 많은데 아무리 뭔가를 해도 가시적으로 해결된다는 느낌이 하나도 안 드니 나중에는 나도 남편도 폐인처럼 무기력해졌다. 모든 의욕이 사라져서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이 말하는 것처럼 소몰이하듯 나를 겨우겨우 끌고 갔다. 본인은 괜찮다고 무한 긍정 라이팅을 하던 남편은 어느 날 집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멍하니 드라마만 보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은 사람처럼.


좋은 걸 봐도 좋은 줄 모르겠고 그러면서 부정적 감정은 땅굴을 파고 들어가서 외롭고 쓸쓸하고 나 빼고 남들은 다 행복할 것 같고 다들 나를 싫어하는 것 같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못할 것 같고. 이제 다 정리됐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기억, 상처가 한꺼번에 넝쿨째 따라오면서 매일 꿈에 예전에 알던 사람들이 나와서 나를 손가락질했다. 이런 기분으로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 좋아하는 맥주를 마셔도 맛이 안 느껴지고 계속 체했다.

 

그러다 이삿짐이 다 빠지고 빈집을 보는데 거짓말처럼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 ‘나는 쓰레기고 난 계속 쓰레기일 거야’ 모드에서 하루아침에 ‘다 괜찮아’ 모드가 됐다. 끙끙대던 원고 마감까지 하고 나니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비로소 여행의 설렘이 느껴졌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평생 결코 극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상처도 대수롭지 않아졌다.


집 정리하면서 남아 있던 흔적들. 이 집에서 3년을 살았다.
우리의 정신 상태 같은 집
여행 가기 전, 친구네 가족이 준 선물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이사라는 큰 문제가 해결되기는 했지만 그 이외에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도 내 마음이 편해짐과 동시에 내게 털끝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이 되다니. 몸 한 군데가 아프면 다른 모든 곳의 신경이 덩달아 예민해져 온몸이 아프고 짜증 나고 이러다 죽겠다 싶다가 갑자기 모든 게 그냥 괜찮은 것처럼. 어쩜 사람 마음이 이렇게 얄궂을 수 있나 싶었다.


그날 미용실에서 ‘질투’에 대해 여러 작가들이 쓴 책을 봤는데 ‘들개이빨’ 작가가 쓴 글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즉 네가 질투하는 사람의 존재 여부는 너에게 달렸다. 네가 관찰하는 순간 그는 100% 존재하고, 신경 끄면 0이 된다.”

“명심해라. 보고 듣고 생각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질투심이 많은 들개이빨에게 작가의 아버지가 해준 이야기라고 하는데 비단 질투만 그럴까. 내가 신경 쓰고 의식하느냐에 따라 그 일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힘들다고 느끼는 상황에 다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는 것 같지만 때로는 힘듦을 받아들이는 장치가 과하게 작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 상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기관이 과열된 것이다. 원효의 해골물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여.


어쨌든 이삿짐은 모두 송추에 있는 컨테이너에 들어갔고, 자동차는 월주차를 해뒀고, 귀중품과 화분은 어린이집 아마들에게 맡겼고, 우리는 빈집에서 침낭 생활을 하다 무사히 공항에 왔고, 부산에서 온 친정 부모님이 합류했고, 비행기를 탔고, 이제 여행을 시작한다.


매일매일 완결성 같은 건 없더라도 꼭 여행 일기를 남기는 게 목표인데 첫 글 길이 보소. 와인 한 잔을 시킬까. <애프터 양>을 한 번 더 볼까. 책을 볼까. 더 잘까. 남은 비행시간 4시간 47분이라고 뜬다.


<자산어보> 보면서 밥 먹을 때만 해도 좋았지
죽 시킴...
이제 곧 LA에 내린다



2022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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