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밀밀 May 05. 2020

친구인 적 없던 아빠의 사랑을 상상하는 밤

[엄마도 엄마를 몰라서] 5살 아이는 친정아빠를 친구라 부른다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쯤 됐을 때였다. 부산과 원주에서 양가 부모님이 아이를 보러 서울 우리 집에 왔다. 그날 아빠는 처음으로 날날이를 봤다.


능숙하게 아이를 안아보는 시부모님과 달리 아빠는 아이가 부서질세라 한발 뒤에 서서 아이를 지켜봤다. 아빠가 뒤에 있는 걸 눈치챈 시아버지는 아빠에게 아이를 건넸다. 이렇게 안으면 된다고. 아빠는 온몸에 힘을 잔뜩 준 채 어설프게 아이를 품에 안았다.


손자와 처음으로 하룻밤을 보낸 친정 부모님은 다음날 부산으로 다시 떠났다. 아이는 남편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었다. 현관문 앞에서 아빠는 아이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아이의 작은 손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순간 나는 얼어버렸다. 아빠가 뽀뽀라니. 상상해본 적 없는 조합이었다.


지역으로 사람을 나누고 싶지 않지만 엄마 아빠는 전형적인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 나도 동생도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해보기는 마찬가지였다.


밥 먹다 TV 가족 드라마에서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혀를 찼다. “참나. 가족끼리 사랑하는 게 당연하지. 그걸 말을 해야 하나.” 뽀뽀? 엄마 아빠가 하는 것도 본 적 없다. 가족끼리 무슨.


엄마는 사랑한다는 말을 꼭 말로 해야만 아냐 했지만 유년 시절 내내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의심했다. 특히 아빠는 늘 무섭고 불편한 존재였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아빠


지난해 여름, 고성에서


아빠는 성질이 불같고 예민했다. 가난했던 아빠는 늘 세상에 화가 나있었다. 매일 신문을 챙겨보던 아빠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도대체가,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였다. 세상에는 아빠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택시에서 유원지에서 식당에서 사람들과 싸웠고 TV만 보면 욕을 했다. 자기 자신만 빼고 다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


아빠는 집안에서 절대적인 존재였다. 아빠의 그날 기분에 집안 분위기가 들썩였고, 아빠 눈에 거슬리지 않으려 온 가족이 눈치를 봤다. 아빠가 소리를 지르면 나는 대뜸 눈물부터 났다. 아빠랑 맞서 싸우고 싶은데 울음에 막혀서 목소리가 안 나왔다. 분하고 서러웠다. 아빠에게 복수할 날을 꿈꿨다.


서울로 대학을 가고 직장인이 된 후에는 더는 아빠가 무섭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사람. 아빠의 존재를 무시하고 외면했다. 돌아보면 아빠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적 없다. 일 년에 몇 마디 안 하는데 그마저도 언쟁이 됐다. 아빠를 닮은 딸은 화가 많고 예민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사이 아빠는 많이 늙고 약해졌다. 단단한 강철 같았던 아빠는 매일 병원을 전전한다. 한숨이 늘었고 짜증이 늘었다. 대신 이제는 싸울 기운도 없는지 화내는 일은 줄었다.


아이와 있으면 아빠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아이 옆에 붙어 눈을 마주치며 놀고, 나사 빠진 사람마냥 헤헤 웃었다. 세상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처럼 아이를 대했다.


“하버지, 하버지” 아이는 부산 할아버지를 좋아했다. 내 기억 속에선 다정한 모습이라고는 없던 사람. 늘 멀게 느껴졌던 사람. 그 사람이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내 아이를 졸졸 따라다닌다. 아빠가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행복이 겨운 웃음소리가 낯설다. 생업 때문에 손자를 자주 보지 못하는 아빠는 밤마다 아이 동영상을 보며 잠든다 했다.



아빠가 내게 남긴 것


지난해 겨울, 부산 태종대에서


코로나 때문에 6개월 만에 아이를 만난 아빠는 아이 눈높이에서 열과 성을 다해 놀았다. 아이는 뼈만 남은 할아버지 등 위에 올라 타 미끄럼틀을 탔다. 듬성 듬성한 할아버지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목마 태워 달라고, 들어 올려 달라고. 할아버지의 몸을 놀이기구 삼아 땀을 뻘뻘 흘리며 놀았다. 아빠는 하나도 안 아프다고 했다.


밤이 되자 아이는 할아버지와 자겠다 했다. 자장가 틀어달라고, 다리 주물러 달라고, 로션 발라 달라고. 뒤척이는 아이를 아빠가 잘 재울 수 있을까. 그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는 할아버지와 잠들었다.


5살 아이는 칠순 앞둔 할아버지를 “친구”라고 부른다. 아빠는 내게 친구였던 적이 없다. 자상하고 뭐든지 다 포용해줄 것 같은 친구 같은 아빠. 나는 그런 아빠를 가져본 적이 없다. 아이가 조금은 부러웠다.


어린 시절 사진 속에서 나는 늘 아빠에게 안겨있다. 나도 동생도 우량아였는데 체구가 약한 엄마 대신 아빠가 우리를 안고 다녔단다. 엄마는 말했다. 아빠가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지 너희에게 참 잘했다고. 나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럼 뭐하노. 기억 하나도 안 나는데. 커서도 좀 잘하지. 마음보다 중요한 게 표현이야.” 아빠를 닮은 딸은 성질이 더럽다.


아빠의 요리만큼은 생각난다. 아빠는 돈까스와 함박스테이크를 집에서 자주 만들어줬다. 한창 공부할 때는 카레가 머리에 좋다는 어느 한의사의 말을 듣고 사흘이 멀다 하고 도시락 반찬으로 카레를 싸줬고 정성스레 계란말이를 해줬다. 매일 아침 아빠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향했다.


진보 언론사 기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아빠는 그 어려운 길을 꼭 가야 하냐 물었다. 돈 못 벌고 힘들고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거라고. 아빠는 알았을까. 내가 기자가 된 건 아빠의 지분이 크다는 걸.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평생 몸 쓰는 일하며 살아온 아빠는 늘 글을 읽고 썼다. 아빠의 딸은 글로 먹고 사는 일을 한다.



친구 같은 아빠


무뚝뚝한 경상도 여자인 나는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뽀뽀를 하는 것도 여전히 어색하다. 그래도 아이가 예뻐서 사랑스러워서 떨리는 목소리로 “알러뷰”라고 말하고 뽀뽀해도 되냐고 물어본다. 그러다 불쑥불쑥 아이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 아빠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아이에게 물었다.


“날날아, 왜 할아버지한테 가서 자겠다고 했어?”
“어. 할아버지가 좋아서.”


아빠는 아이에게 투명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언젠가 만난 인터뷰이는 그런 말을 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님도 나를 이렇게 사랑했겠구나, 위안받게 된다고. 아이를 대하는 아빠를 보면서 나도 아빠의 사랑을 뒤늦게 상상해본다. 어긋나고 비뚤어졌지만 마음만은 사랑이었을 사랑을. 아이가 할아버지를 사랑해서 다행이다.


아빠 같은 부모가 될까 봐 나는 오랜 시간 두려웠다. 아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바스라질 듯 작아져 손자 바보가 된 아빠를 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아빠가 지금 내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나를 대했다면 나는 친구 같은 아빠를 가질 수 있었을까. 아빠를 미워하지 않고, 아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을까. 그럼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가장 후회스러운 사람은 아빠일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