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제주한담

운전하며 노래부르기

by 홍난영

그날은 평소처럼 라디오를 틀어놓고 중산간 마을에서 내려가는 길이었다. 차가 한 대도 없어서 신났다. 그게 좋았을까? 나도 모르게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에 맞춰 흥얼거렸다.


순간 멈칫했다.


이거 뭐지?


하지만 이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뭐 어때, 이 도로엔 나뿐이라고. 들을 테면 들으라고!


photo-1486330071120-ba4e79e49431.jpg © livin4wheel, 출처 Unsplash



서울에서 운전할 때 내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딱히 지을 표정도 없었다. 혼자 운전하는데 어떤 표정을 지으란 말인가. 무표정하게 라디오를 듣고, 음악을 듣는 게 운전 중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떠올랐다. 월터는 잃어버린 사진 필름의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사진작가를 만나러 간다.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등을 다니며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바다 한가운데 헬기에서 뛰어내리기, 폭발 직전 화산으로 돌진하기 등의 모험을 하게 된다. 그중에 아이슬란드에서 월터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내리막길을 시원하게 내려오는 장면이 있었다.


photo-1477466535227-9f581b3eec21.jpg © alternateskate, 출처 Unsplash


바로 그 장면, 내가 지금 꼭 그러고 있는 것 같았다. 스케이드 보드는 아니지만 지.금.나.는. 차로 내리막길을 시원하게 내려가고 있지 않은가. 무언가 나를 감싸고 있던 껍질 하나가 툭,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왜 서울에서 웃지 못했던 걸까. 웃을 일이 없었던 걸까, 웃을 일이 많아도 공감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웃는 걸 잊어버렸던 걸까. 월터가 잃어버린 사진 필름을 찾아 떠났다면 나는 웃음을 찾아 떠나온 게 아니었을까? 내가 제주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어쩌면 꽉꽉 막혀있던 나에게 숨통을 좀 틔워줘야 한다는 경고음을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항상 무언가 멋들어지게 해야 할 것 같았고, 멋들어진 것이 없으면 그런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제대로 하지도 못했지만 그러는 사이에 내 속은 문드러졌다. 나는 나로 살아가고 싶은데 그렇게 사는 건 너무나 힘들었다. 방법이 없었다. 내가 아닌 척 살아가는 척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표정이 하나둘씩 사라졌을 것이다. 제주가 특별한 건 아니지만 여태까지 이렇게 여행해본 적도 없으니 내게 있어선 특별하기도 하다.


나는 나를 위한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어쩌다 보니 나이를 먹었고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다. 제주여행의 목적이 무엇이든 겉껍질 하나가 벗겨졌다. 그걸로 된 거다. 균열은 시작됐기 때문이다.


제주에 이사 온 지 2년이 지난 지금은 길 막히는 제주도로에서도 노래를 부를 줄 안다. 뽕짝도 부르고 발라드도 부른다. 가사를 몰라도 대충 지어서라도 막 부른다. 조금은 뻔뻔해졌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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