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인 시인의 사회'는 영화가 원작이지만 나는 책을 먼저 읽었다. 보통 동명의 영화와 책이 있으면 책이 원작인 경우가 많아 당연히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고전을 영화가 리메이크한 걸로 착각했다. 그래서인지 책을 보면서 영화와 같은 박진감이 느껴져 하루 만에 완독 할 수 있었다.
웰튼 아카데미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학생을 아이비리그에 보낸 명문학교이다. 그들은 규율과 학문에 대한 성실성 등 모범적인 생활을 강조한다. 그러나 새로운 국어 선생님인 존 찰스 키팅은 이들의 철학과 반대되는 수업을 한다. 학문에 치인 학생들에게 현학적인 내용으로 시를 해부하는 것이 아닌 그저 시를 낭송하게 할 뿐이다. 교과서 내용에 대한 수업보다는 그들의 인생에 남을 따뜻한 조언을 건넨다. 학생들에게 그의 수업은 삭막한 웰튼 아카데미에서의 쉼터가 된다. 자식들이 그저 학문에만 집중하여 자신들의 꿈을 대신 이뤄주길 바라는 부모님과 이와 반하는 꿈을 가진 소년들과 키팅 선생님의 갈등이 이야기의 중심 내용이다.
책을 읽다 보면 지금의 사회와는 맞지 않는 어색한 부분들이 있다. 등장인물인 낙스가 자신이 좋아하는 크리스를 사로잡기 위해 무단으로 그녀의 교실에 들어가 창작시를 낭송하는 부분이 있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말이다. 지금이라면 인터넷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흑역사가 될 것이다. 낙스도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런 무모한 짓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책을 읽는 나도 낙스의 고백이 부끄럽고 어색했다. 더 놀라운 건 크리스가 막스의 '고백 공격' 이후로 호감을 느끼고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사랑'이 내게는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남자친구가 있는 걸 알면서도 사랑에 도전하는 게 '로맨틱'이고 '낭만'이라니, 게다가 상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용기'라는 건 공감할 수 없었다.
반대로 책의 내용에 공감한 부분도 있었다. 내가 학생 때도 문학을 공부할 때 교과서에 적힌 작가의 의도를 외우는 식의 교육을 받았다. 고전문학에도 작가가 생각한 주제와 구절에 대한 해석이 있었다. 출판사에서 조선시대에 살았던 작가를 인터뷰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그들이 설정한 주제도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문학을 배우면 안 된다. 웰튼 아카데미에서 하는 교육과 다를 것이 없다. 학생들이 문학에 다가갈 수 있는 마중물이 되어야 할 국어 수업이 그저 시험을 위해 교과서에 적힌 주제를 외우는 암기력 테스트로 전락한 것이다. 이는 직접 문학을 읽다 깔깔대며 웃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결국 자신만의 해석에 다다르는 과정이 생략된 최악의 수업방식이다. 이런 교육방식이 내 또래의 친구들이 문학을 접하지 못하게 되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책을 고를 때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제목이 와닿았다. 그 세 단어가 꼭 지금의 사회를 꼬집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부터 SNS에서 사람들이 고민을 토로하면 작성자의 힘듦에 공감하기보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칼 들고 협박함?', '근데 작성자도 피곤한 타입이네'같은 비꼬는 댓글들이 많아졌다. 사랑도 건조해졌다. 사랑에 공식이 생긴 것처럼 '이런 사람은 만나면 안 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식의 정석집이 늘어났다. 시로 마음을 고백하는 건 그저 오글거리는 구식이 되었다. 막스만큼은 아니어도 사랑은 조금 구식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좋아하면 주도권을 뺏긴다'같은 연애 이론이 아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시로도, 편지로도, 따뜻한 포옹으로도 표현하는, 이별했을 때는 그리워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상대방을 잡기 위해 내 가장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사랑이 그렇다. 나도 그런 사랑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