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선정의 아름다움이 자연의 경치를 눌렀다

by 레드산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 살다 보면 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결과를 맞닥뜨리는 경우가 있다. 그때는 로또복권을 맞은 것처럼 말할 수 없이 기쁘고, 흥분된다. 살면서 그런 경우가 많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현실은 로또복권 맞기만큼이나 어렵다.

이번 영월 여행에서는 기대한 것 이상의 기쁨을 맛본 멋진 정자를 만났다. 정자의 매력에 빠져 전국에 이름난 정자 목록을 만들어 찾아다닌 적이 있다. 욕심 같아서는 빨리 그 정자들을 다 보고 싶지만,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라 기회가 생길 때마다 정자를 찾는다. 어느 지역으로 여행을 갈 때는 그 지역에 멋들어진 정자가 있는지를 꼭 살핀다. 예전에 만든 정자 목록에 영월 요선정이 있다. 직접 가보지는 못한 채, 인터넷으로 사진만 여러 번 보았다. 정자 옆에 집채만 한 바위가 있어 인상이 깊었던 곳이다.

세상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영월을 몇 번이나 다녀왔지만, 요선정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영월을 오랜만에 간다. 처음부터 영월에 가려고 했던 건 아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꽁꽁 묶여 지내는 갑갑함이나 풀어보려고 어디라도 다녀오고 싶었다. 그런 차에 요선정이 떠올랐다.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아 요선정을 목적지로 정했다.

가을이 깊어가는 영월의 풍광은 요선정으로 가는 마음을 한층 더 들뜨게 한다. 아직은 단풍 들 때가 아니지만, 곧 벌어질 화려한 가을 잔치를 예고하는 분위기와 느낌은 가득하다. 보고 싶은 곳을 찾아가는 설렘과 가을이 만들어낸 경치가 있어 국도를 달리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좋다. 정자 여행을 즐기는 가장 큰 이유는 정자가 품은 경치 때문이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정자 여행의 8할은 정자가 품은 경치에 있다. 점점 더 깊은 가을 속으로 빠져드는 계절에 요선정이 과연 어떤 경치를 보여줄지 자못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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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차 세우기가 좋다. 차에서 내리자 서늘한 기운을 품은 영월의 맑은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든다. 역시 영월의 가을은 도시의 가을보다 한 발짝 더 앞서간다. 울창한 나무숲을 따라 나 있는 길을 걸으면 절인 지도 몰랐던 미륵암이 나온다. 미륵암 앞에 서 있는 이정표가 요선정의 방향을 일러준다. 오른쪽으로 길을 바꿔 숲길에 들어선다. 얼마 가지 않아 살짝 가파른 길이 나오는데 데크 계단으로 되어 있어 힘든 건 없다.

가는 길 왼편으로 주천강이 눈에 들어온다. 내려다보이는 주천강 경치는 요선정이 어떤 경치를 품었을지 대충 짐작게 한다. 그 경치는 맛보기이자 힌트라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를 때와 맛보기를 보고 났을 때의 기대감과 설렘은 다를 수밖에 없다. 영화도 예고편을 보고 나면 본 영화가 더욱더 보고 싶어진다. 그것처럼 맛보기를 보고 나니까 궁금증이 더해져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빠르게 계단을 오른다.

데크 계단 끄트머리에서 요선정을 보는 순간, 입이 떡하니 벌어진다. 사진으로 보았던 요선정과 직접 눈으로 보는 요선정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기대했던 것 이상의 멋진 정자 모습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요선정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주 적당한 크기이다. 단청은 입은 정자는 화려한 듯하면서도 정갈하고, 은근하게 당당함을 풍긴다.

요선정 좌우에는 집채만 한 커다란 바위가 호위무사처럼 요선정을 지키고 서 있다. 그것으로는 묵직하게만 보일까 싶어 키 큰 소나무들이 운치를 더해준다. 정자 앞마당에는 아담한 오층석탑까지 있어 요선정에 색다른 멋을 보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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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선정은 이 지역에서 살았던 원 씨, 곽 씨, 이 씨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숙종과 영조, 정조의 어제 시를 봉안하기 위해 1913년에 세웠다. 정자에는 "요선정"과 "모성헌"이라는 두 개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다. 어제 시는 임금이 지은 시로 그 현판 뒤에 세 임금의 어제 시가 담겨 있다고 한다. 요선정은 맞을 요(邀)에 신선 선(仙) 자를 쓴다. 뜻 그대로 신선을 맞이하는 정자이니 신선이 반할 만큼 빼어난 경치를 품고 있을 게 틀림없다.

언뜻 보면 신선이 반할 만한 경치는 보이지 않는다. 요즘 말로 요선정이 밀당을 하고 있다. 경치에 앞서 정자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한다. 그런 다음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이 감추어둔 경치를 슬그머니 펼쳐놓는다. 요선정 옆에 있는 가파른 절벽에서 내려다보는 주천강 경치는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는다.

크게 휘어져 흐르는 강줄기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강에서는 여름을 보내기가 아쉬웠든지 뒤늦게 천렵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다. 해머로 바윗돌을 내려쳐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 모습은 마치 딴 세상을 사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세상은 코로나네 뭐니 해서 다들 한숨이 꺼지고 잔뜩 움츠렸다. 그들 모습에서는 지금의 안타까운 상황은 보이지 않고 마냥 평온해 보인다. 요선정의 행정 주소가 무릉도원 면이다. 한가롭게 고기 잡는 모습을 보면 무릉도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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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선정 양옆으로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서 있다. 왼편에 있는 바위에는 무릉리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높이가 무려 3.5m나 되는 커다란 바위이다. 바위가 큰 것도 눈길을 끌지만, 생김새 또한 독특하다. 전체적으로는 둥그스름하지만, 한쪽 끝부분이 올라가 있다. 그 모습이 빚어놓은 만두처럼 보여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안내문을 읽어보면 고려 시대의 마애여래좌상이다. 전체적으로 힘이 넘치지만, 균형이 맞지 않고 옷 주름과 신체 각 부분의 표현이 형식화되어 있어 고려 시대 지방 장인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쓰여 있다. 전문가 눈에는 그렇게 보일런지 모르겠지만, 여행자 눈에는 여느 마애불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것보다는 비바람 맞으며 흘러가는 세월을 지켜보고 서 있었을 그 자체가 신기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요선정 앞마당에는 자그마한 오층석탑이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서 있다. 지금껏 꽤 많은 정자를 보았지만, 정자에 마애불과 석탑이 있는 곳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요선정은 작은 암자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그에 대한 해답은 요선정에 얽힌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통일 신라 시대 때, 명망 높았던 징효 대사가 이곳에 있는 암자에서 열반했다고 한다. 대사의 몸에서 사리가 1,000여 개나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 역사에 마애여래좌상과 오층석탑을 연관 지어 보면 요선정이 자리한 이곳은 불가와 깊은 인연이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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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여행의 8할은 정자가 품은 경치에 있다. 요선정은 그와 달리 정자 자체의 아름다움과 특별함이 8할을 차지한다. 정자의 아름다움이 8할을 차지하는 곳은 흔치 않다. 아무리 정자의 매력이 넘쳐도 주변 경치가 평범하면 그 매력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정자의 아름다움이 조금 떨어져도 품고 있는 경치가 빼어나면 정자의 멋과 품위가 한껏 살아난다. 요선정이 품은 경치에 2할을 매겼지만, 그렇다고 경치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도 2할을 매긴 것은 요선정의 아름다움에 그만큼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런 멋과 맛이 있어 정자 여행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