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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Sep 17. 2021

아무리 보아도 목마름이 가시지 않는 정자가 초간정이다

초간정(草澗亭)은 경북 예천에 있다. 사는 서울에서 먼 곳이지만, 대여섯 번을 다녀왔다. 우리나라가 땅덩어리는 좁아도 사계절이 뚜렷해서 가볼 만한 곳은 무궁무진하다. 그 많은 곳을 다 보려는 욕심이 있어, 갔던 곳을 일부러 다시 찾는 경우는 어지간해서는 흔치 않다. 그런데도 초간정을 대여섯 번이나 찾았다는 건 그만큼 초간정의 멋과 아름다움에 푹 빠졌다고 할 수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동안 여행한 곳 중에서 딱 한군데를 준다고 하면 망설임 없이 초간정을 택할 것이다. 초간정은 정자와 주변 경치가 완벽하게 어우러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초간정은 이런 아름다움 말고도 내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초간정을 처음 본 것이 2010년 5월이다. 그때는 여행에 빠져 전국을 휘젓고 다닐 때였다. 한 군데라도 더 보려는 욕심에 유행가 가사처럼 대전, 대구 찍고 부산 찍는 식으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게 아닌데 하는 회의감이 밀려들기 시작할 무렵에 초간정을 만났다. 

처음 본 초간정의 아름다움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흔히 한 폭의 동양화 같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처음 본 초간정은 동양화 같은 게 아니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완벽한 그림이었다. 우리 땅에 이렇게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라웠다. 요즘 말로 하면 한눈에 뿅 가버렸다. 

초간정을 보면서 정자가 이렇게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자 여행을 시작했다. 또 초간정이 내어주는 여유로움과 차분함을 알고부터 정신없이 쏘다녔던 여행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초간정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초간정은 볼 때마다 새롭고, 그 아름다움은 아무리 보아도 물리지 않는다.

 


한동안 정말 열심히 정자를 찾아다녔다. 어디를 여행하던 정자가 최우선이었다. 빨리 끓는 냄비가 빨리 식는다는 말처럼 어느 때인가부터 정자를 찾는 게 시들해졌다. 그렇다고 정자 여행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예전처럼 열정이 넘치지 않았다. 그것도 한때였나보다 했는데 요즘 들어 다시 정자 생각이 많이 난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듯이 이참에 다시 정자 여행을 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큰일을 앞두고는 꼭 국립현충원을 찾는다. 그 사람들과 같은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정자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으니까 초간정부터 생각난다. 처음 초간정을 보았을 때의 감동과 희열을 다시 느끼면서 정자 여행의 매력을 되짚어보고 싶었다. 

여름 날씨가 점점 무더워진다. 이제는 35~6도의 무더위가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는 뜨거운 날에 초간정을 간다. 앞서 다녀온 지가 제법 오래돼서 설렘과 기대가 크다. 한편으로는 보지 못한 사이에 몰라보게 변하지는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요즘은 어디든 사람들이 좀 찾는다 싶으면 가만두지를 않는다. 사람들 편하게 이런저런 시설물을 짓기 일쑤다. 그것들이 때론 여간 볼썽사나운 게 아니다. 

초간정 입구의 주차장이 번듯하게 바뀌었다. 밖을 나다니기 힘든 날이지만, 막상 도착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초간정이 사라질 것도 아닌데, 조금이라도 빨리 보려는 무의식의 발동으로 허둥댄다. 초간정에만 오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서둘러 카메라를 챙겨 들고 종종걸음을 친다.

 


초간정의 멋과 아름다움은 시원한 계곡과 나무숲 그리고 정자가 어우러져 만들어진다. 초간정 앞으로 소백산 자락 용문산에서 내려온 계곡이 지나간다. 초간정에서 불과 1~200m 떨어진 곳의 계곡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그랬던 것이 초간정에 이르러 반전을 보여준다. 자연의 섭리인지 초간정을 위한 배려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전의 계곡이 있어 초간정의 아름다움이 더해진다.

계곡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물길을 내주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끌어들였다. 그 바위들 위에 돌로 축대를 쌓아 초간정을 앉혔다. 초간정은 계곡 쪽으로 툭 터져 있어 계곡의 시원한 경치와 물소리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우거진 나무숲이 초간정을 품고 있어 안 그래도 멋진 경치를 더욱 숨 막히게 한다. 이렇게 하나로 어우러져 초간정의 아름다운 경치가 완성된다. 이 때문에 초간정은 보고 또 봐도 싫증 나지 않는다. 오히려 보면 볼수록 초간정의 매력에 더 깊숙이 빠져든다. 초간정의 경치는 자연과 인공물의 절묘한 합작품이다. 

볼 때마다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겨버리는 초간정에 오르려고 발걸음을 옮긴다. 정자에 올라 여유 있게 즐기는 경치와 분위기가 초간정의 참멋이다. 조용한 가운데서 느긋하게 정자를 지은 분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초간정을 거쳐 간 옛사람들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이 정자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초간정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면 비스듬히 누운 커다란 소나무가 찾아오는 이를 맞이한다. 오랜 세월 서 있기가 불편해 드러누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나무가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느낌을 준다. 처음 오는 사람이 예사롭지 않은 이 소나무를 보면, 초간정에 다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정자 여행을 하다 보면 정자 주변에 이곳에 정자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빼어난 자태의 나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초간정 주변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원림을 이루고 있다. 묵직한 세월을 품은 나무들이 찾아오는 이들의 눈을 정화해준다. 초간정을 보기 전에 먼저 눈부터 깨끗이 하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초간정에 대한 사랑이 너무 일방적이라고 핀잔을 들을 수 있겠지만, 그 사랑에 눈이 멀어버렸으니 어쩌겠는가. 

여러 번 왔으면서도 원림의 나무를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지 싶다. 그전 같으면 스쳐 가듯이 쓱 한번 훑어보고는 서둘러 초간정으로 눈길을 돌렸다. 초간정에 왔을 때마다 왜 그렇게 마음이 조급했는지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초간정과 주변 경치는 특별하다. 초간정으로 가는 국도 주변은 그저 평범한 시골 모습이다. 이런 곳에 정자가 있을까? 싶은 의구심이 든다. 이렇듯 평범한 곳에 초간정이 몸을 숨기고 있어 더욱더 반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고개를 숙이고 자그마한 문을 들어서 초간정과 마주한다. 정자의 이마에는 “초간정사” 현판이 붙어 있다. 왼편에 온돌방이 있고, 오른쪽은 열린 공간으로 마루가 제법 널찍하다. 초간정 맞은편에서 주변 경치와 함께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맞은 편에서 보았던 경치가 광각렌즈로 담아낸 아름다운 경치라면, 눈앞에 보이는 초간정은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고 주제만 부각한 깔끔한 사진을 보는 듯하다.

또 맞은편에서 보는 경치는 말할 수 없는 멋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정면에서 보는 초간정은 절제미를 품은 진중한 모습이다. 그건 아마도 초간정이 단순히 풍류나 즐기려고 지은 정자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초간정은 정자를 세운 초간 권문해 선생의 별채 공부방이었다. 



초간 권문해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지으신 분이다. 선생의 책은 우리나라와 중국 책을 모조리 섭렵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고조선부터 조선까지 역사를 중심으로 지리, 문학, 예술 등을 담고 있다. 여기서 잠깐 권문해 선생에 대해 알고 가야 할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조선 시대는 사대주의가 만연했던 시기라는 것을 학창 시절에 배워 알고 있다. 그런데 권문해 선생은 당시 우리 학자들의 학문을 대하는 태도가 사대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것에 아주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시대의 조류와 다른 생각과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이 아주 흥미롭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한다는 옛말이 있다. 안 그래도 멋이 넘치는 초간정인데, 거기에 권문해 선생의 인품까지 보태지니 초간정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더 깊어진다. 

초간정 마루에 올라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처마 밑으로 눈길이 갔다. 앗! 처마 밑에 큼지막한 말벌집이 달려있다. 말벌들이 기세등등하게 벌집을 에워싸고 있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큰 낭패를 볼 것 같다. 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윙윙거리는 말벌들을 못 본 척하자니 겁이 나고, 그대로 돌아서려니 이만저만 아쉬운 게 아니다.

 


정자에 앉아 초간정의 참멋을 즐겨보는 게 처음은 아니다. 올 때마다 즐겼지만, 그렇다고 그 즐거움을 포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라 온몸이 땀에 젖었다. 정자 마루에 앉아 경치를 보면서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해주는 계곡 물소리를 들으려던 계획이 틀어지게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돌아서기가 너무 아쉽다. 말벌들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정자에 오른다. 

뒤통수는 계속 간지럽다. 불안한 마음에 차마 마루에 앉지는 못하고 엉거주춤 서서 계곡을 바라본다. 며칠 전, 비가 내려서 그런지 계곡물이 많이 불었다.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하얀 물거품이 사방으로 퍼진다. 주변이 조용해서 부서지는 물소리가 한결 더 크게 들린다. 가냘픈 한 줄기 바람도 없지만, 시원한 물소리가 있어 더위와 여행의 피로를 잊게 해준다. 아! 초간정을 일주일 아니 딱 하루만이라도 온전히 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보아도 목마름이 가시지 않는 초간정이 내게는 최고의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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