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된 연인과의 이별

그건 차라리 후련함이었을까

by 홍삶

요즘 나의 밥친구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보고 있는 킬링타임용 드라마다.


얼마전 서브 여주 표남경과 7년 된 연인이 헤어지는 장면이 나왔다.

남경은 대학병원 1년차 전공의이고, 연인 기동은 취준생이며

한두 번 싸우고 헤어진 게 아니지만 이번엔 진짜다.


기동은 말한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처음으로 후련했어. 니탓 할 수 있겠다 싶어서.”

먼저 헤어지자고 할 용기는 없었던 자다.


남경은 말한다.

“다시 만나자고 안할게. 친구 하자고도 안할게. 병원 오거나 아픈 사람 있으면 전화해!”

다시 만나고 싶고, 친구라도 하고 싶다는 외침이다.




내게도 7년의 만남과 이별이 있었다.

헤어질 무렵 나는 3년차 직장인이었고 그는 해외의 대학원생이었다.

공감대는 떨어져 가고 의무감에 연락을 이어가던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나, 여기서 다른 사람 만나게 됐어."


머릿속이 하얘졌고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바람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이제 진짜 끝이구나 싶었다.

피가 확 식는 느낌이 들며 오히려 차분해졌다.


'괜찮아. 이별이 처음도 아닌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거 알잖아.

안그래도 요즘 지지부진했는데,

오히려 확실하게 헤어질 이유를 만들어 줘서 고맙네.'


말로는 그렇게 되뇌었지만,

헤어지고도 오랫동안 그를 핸드폰 단축번호 1번으로 해두었다.

워낙 오래도록 1번이었기에 차마 바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 신변에 큰일이 생겨 우연히 누군가가 1번을 눌러 그를 부르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가끔 하곤 했다.


2년쯤 지났을까?

뜬금없이 그에게 밥 한 끼 하고 싶다고 메일로 연락이 왔다.

그가 해외로 갈 때 내가 영문 CV를 첨삭해 주곤 했던 계정이었다.

한국의 어느 기업에 취업했음을 알리듯 메일 아래쪽에 명함이 딸려왔다.


잠깐 승리의 기분을 맛봤지만 이내 씁쓸했다.

‘너무 가볍게 연락한 건 아닐까 싶지만’

가볍게 연락했다는 자수와도 같은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며칠 생각 끝에 보고 싶지 않다는 회신을 했다.


답장이 왔다.

"응 잘 지내길 바라^^"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욕 한 바가지 해 주고 싶었지만 공격력이 떨어졌던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다.

그저 안 만나기로 결정하길 잘했다며 친구들에게 뒷담화나 하고 끝냈다.


시원하게 욕도 한 번 안 하고,

그렇다고 미련에 바짓가랑이를 잡지도 않고,

그렇게 어영부영 7년 연애를 종결했다.


슬픔을 티내는 건 구차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립지 않은 척, 타격 없는 척 자존심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것 같다.

남경이처럼 울고불고 했더라면 좀더 진심으로 후련했을까?


그와의 연애가 후회되진 않는다.

단지 힘든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꾹꾹 눌러 참기만 했던 게 후회가 된다.




그는 나처럼 눈매가 처졌지만 좀더 소심해 보이는 여자와 결혼해

꼭 자기처럼 못생긴 애를 낳고

KTX 환승할 때 아니면 갈 일 없을 먼 곳에서 산다.


기억의 서랍에서 꺼낸 김에 이제라도 시원하게 욕해 본다.

잘살지마 이 배신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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