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밑줄
내가 경찰이라는 조직에 입사한 지 이제 겨우 3년이 넘었어. 얼마 안 되는 햇수인데, 그사이 스스로 너무 많이 늙어버렸다는 생각을 해. 3년 동안 참 많은 사람을 봤어. 말 그대로 사람 말이야. 살아있는 사람,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죽어있던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 옆에 남은 사람들까지.
한 사람 속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세상은 그 이야기에 도무지 관심이 없더라. 어제 사람이 죽어서 인구가 한 명 줄어버린 관내를 오늘 아무렇지 않게 순찰해야 하는 직업,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탓에 그 누구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직업, 그게 경찰관이더라. 다른 게 아니더라고.
경찰 일을 오래 하면 현장에 갔을 때 떨어진 피의 양만 봐도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있대. 정말 맞는 말 같아. 굳이 피를 흘리지 않아도, 그 사람의 눈동자만 쳐다봐도 얼마나 삶이 망가졌는지 어느 정도 가늠이 가는 걸 보면. 언니는 삶이 송두리째 망가진 사람을 본 적이 있어?
언니, 나는 생명윤리라는 건 이제 잘 모르겠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 살 바에는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까. 매일 소주를 마시면서 행패만 부리는 주취자를 보고 이 사람은 얼른 사라지는 게 나라를 위한 일이겠다는 생각을 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욕을 하고 침을 뱉으며 노상 방뇨를 하는 아저씨를 보면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고. 건실하고 건강한 사람만이 존엄한 생명은 아닌데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며 저런 삶은 가치 있는 삶일까 하는 생각이 나를 잡아먹고 있어. 언니는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점점 회의적이고 냉소적으로만 변해가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게 견디기 힘들다고 어느 선배에게 토로했더니, 선배는 그런 이유로 괴로워하는 너는 아직 초심이 남아있는 거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언니에게 이 편지를 쓰게 되었어.
내가 초심을 잃어가는 기록, 내가 그동안 쌓아올린 나만의 정의감이 손바닥 속 모래알처럼 점점 흩어지는 것에 대한 관찰기, 다른 사람도 아닌 언니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양심의 자책.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옳고 그름은 또 무엇인지, 범죄란 진정 무얼 뜻하는 말인지. 그리고 돈으로 굴러가는 세상에선 전혀 주목받지 못하는 어느 사람의 일생, 이 모든 것의 한가운데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경찰관의 일기. 그것에 대한 이야기야. 내가 이 편지를 언니에게 부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혹시나 언니에게 이 글이 닿는다면 나에게 전화 한 통 해줘. 기다릴게.
- 원도의 책 <경찰관 속으로(언니에게 부치는 편지)>(이후진 프레스) 중에서 -
매거진 <책 표지와 밑줄친 문장들>은 책을 읽으면서 밑줄친 문장들을 모으고, 표지 한 장 그려 같이 껴넣는 개인 수납공간입니다. 요새 시간이 많아서 누가 보면 배곯고 다닌 사람처럼 만나는 족족 책을 해치우고 있거든요. 제 마음을 요동치게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도 수신되기를 바라면서 칸칸이 모아놓을 예정입니다. 고상한 취향을 보여주기 위해 그럴싸한 문장만 골라낼 생각은 없습니다만, 예쁜 표지를 만나면 표지가 예뻐서 올리는 주객전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 1회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