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밑줄
먼지 : 네, 출판사 김먼지입니다.
독자 : 저어, 내가 ‘인생의 마지막에 읽는 책’이라는 걸 샀는데, 이게 찢어져서 왔소.
먼지 : 어머, 어르신. 너무 죄송합니다. 구입하신 서점에서 바꾸실 수 있어요.
독자 : 그런데 내가 이틀 뒤에 일본으로 출국을 하는데, 그 서점에 찾아가서 바꾸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먼지 :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혹시 찢어진 책 사진을 찍어서 주소랑 같이 제게 보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확인 후 바로 보내드릴게요.
독자 : 꼭 좀 부탁합니다. 아내에게 꼭 선물하고 싶은 책이라서….
먼지 : 네네, 그럴게요!
잠시 후, 문자로 사진은 안 오고 주소만 달랑 왔다. 연로하셔서 깜박하셨나 보다 하고 그 주소로 새 책을 보내드렸다. 그 할아버지가 책도 사지 않고 그런 식으로 출판사로 전화를 걸어 새 책을 받아낸 뒤 중고로 파는 유명한 상습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몇 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할아버지, 출판사 코 묻은 책 중고로 팔아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먼지 : 네, 출판사 김먼지입니다.
독자 : 저어… 내가 『인생의 마지막에 읽는 책』이라는 걸 샀는데, 이게 찢어져서 왔소.
먼지 : …저기, 어르신.
독자 : 예?
먼지 : 동에 사시는 어르신 맞으시죠?
독자 : ….
먼지 : 지난번에도 저희 출판사에 전화해서 책 받아가셨어요. 공짜로요. 그런데 어르신, 그거 ‘중고나라’에 파신다면서요? 출판사에 소문 이미 많이 난 거 아세요?
독자 : 허허허, 내가 돈이 없어서 그랬어요. 미안합니다!
먼지 :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어르신.
독자 : 내가 이다음에 꼭 갚겠습니다! 허허허!
- 김먼지의 책 <책갈피의 기분>(제철소) 중에서 -
매거진 <책 표지와 밑줄친 문장들>은 책을 읽으면서 밑줄친 문장들을 모으고, 표지 한 장 그려 같이 껴넣는 개인 수납공간입니다. 요새 시간이 많아서 누가 보면 배곯고 다닌 사람처럼 만나는 족족 책을 해치우고 있거든요. 제 마음을 요동치게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도 수신되기를 바라면서 칸칸이 모아놓을 예정입니다. 고상한 취향을 보여주기 위해 그럴싸한 문장만 골라낼 생각은 없습니다만, 예쁜 표지를 만나면 표지가 예뻐서 올리는 주객전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 1회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