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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심 Mar 28. 2020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

여섯번째 밑줄


뉴스를 헤드라인 위주로만 읽곤 하는 남편이 최근에는 나에게 별 생각 없이 기억에 남는 사건 사고들을 읊었다. 주로 이번에 어떤 남자가 여자에게 무고하게 당했다더라,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일을 벌였다더라 하는 것들이었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듣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불편한 의아함이 치밀었다.

“그런데 너는 왜 그런 종류의 기사만 눈에 들어와?”
“어? 아니, 그냥 요즘 그런 일이 많으니까.”

아마 언론에서 그런 기사를 눈에 띄게 다루고 배치하고 있는 것이리라. 남녀 대결 구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진 만큼 말이다. 그리고 남편은 아마 도덕적이라 할 수 없는 과격한 페미니즘, 남성의 편을 들기에 합당하다 여겨지는 사건들에 집중함으로써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는 보편적 혐오를 외면하고 한국 남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방어했다.(중략)


아마 페미니즘이 여혐을 반대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미러링의 형태로 구현되면서부터 남성들은 한층 더 분노하기 시작한 것 같다. 여성들이 예쁘고 바르게 행동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할수록 그들이 해온 혐오를 타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워마드’나 ‘메갈’ 같은 사이트에서 테러지향적인 페미니즘을 보인 것도 사실이고, 이에 대한 반발도 상식적인 의미에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성에 대해 다루어졌던 것을 그대로 뒤집어 남성에게 표현하자 지금까지 남성의 전유물로 농담처럼, 장난처럼 건네졌던 여혐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고 ‘감히?’ 하고 여성을 더욱 억누르는 쪽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한 인터넷 서점에서 고객들에게 보내는 메일에 ‘한남스럽다’는 표현이 사용된 것 때문에 남성 회원들이 다수 탈퇴한 사건이 있었다. 그 헤드라인이 사용된 기사가 결코 맥락 없는 남성혐오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 작가가 한국 남성의 역사에 대해 들여다보는 사회적인 분석과 논리를 다루고 있었음에도. 이토록 ‘한남’이라 불리는 데에 분노하는 남성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까지 어째서 분노하지 않고 침묵했는지. 어째서 ‘된장녀’와 ‘맘충’을 거리낌 없이 소비했는지.(중략)


여성들 대부분이 공중화장실에 갈 때마다 몰카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다. 한 번이라도 남성들이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혹시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별 생각 없이 몰카를 소비하지는 않았을까? 여성 대상의 오래된 범죄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던 이들이, ‘몰카를 찍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다 범죄자’라는 공격에 이제야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나는 아닌데 왜 남자들을 다 범죄자로 동일시하느냐’고 억울해한다.


한국 남성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걸 불편해하기 전에, 몰카 범죄를 같이 불편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가해자의 성별과는 별개로, 잘못된 일에 대해서 같이 분노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지금까지는 몰랐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침묵에 대해 공격받고 있는 지금, 어쩌면 분노의 대상은 기존의 보편적 관념을 공격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오랫동안 관철되어 온 불평등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남자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화를 내고 있는데, 여성들의 삶을 위해서는 도대체 누가 화를 내고 목소리를 내어줘?”
“…내가 분노해줄게.”

남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비로소 우리가 잠시나마 같은 세계에 발을 디뎠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은 안심했다.


- 박은지의 책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생각정거장) 중에서 -



매거진 <책 표지와 밑줄친 문장들>은 책을 읽으면서 밑줄친 문장들을 모으고, 표지 한 장 그려 같이 껴넣는 개인 수납공간입니다. 요새 시간이 많아서 누가 보면 배곯고 다닌 사람처럼 만나는 족족 책을 해치우고 있거든요. 제 마음을 요동치게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도 수신되기를 바라면서 칸칸이 모아놓을 예정입니다. 고상한 취향을 보여주기 위해 그럴싸한 문장만 골라낼 생각은 없습니다만, 예쁜 표지를 만나면 표지가 예뻐서 올리는 주객전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 1회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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