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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심 May 12. 2020

내 아이가 아플 수 있다는 가정


“우리 아이 제발 살려주세요.”
가끔 드라마에서 젊은 아기 엄마가 의사를 붙잡고 아이를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때마다 여지없이 우리 엄마를 떠올린다. 갓 돌이 지난 시점에 죽음을 목전에 둔 나를 안고 엉엉 울던 서른셋 엄마를 떠올린다.

당시 로타바이러스 감염증이 유행이었다. 먹는 족족 토하거나 물 같은 설사를 하는 병이었다. 그중에서 나는 탈수 증상이 심했다. 그대로 방치하면 사망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병원에서는 응급실에 자리가 없다며 치료를 거부했다. 홍익병원, 세브란스 병원 그리고 서울어린이병원에서조차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결국 엄마는 응급실 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다고 했다.

다행히 마침 퇴근길인 병원장이 엄마를 발견하고 직접 진료하겠다고 나선 덕분에 나는 응급실 한켠 주사실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엄마의 가슴을 몇 번이나 떨어뜨리고 며칠 더 애태운 후에야 혈색을 되찾았다. 엄마는 ‘너 그때 잘못됐으면 나도 못 살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 한 마디로 엄마가 당시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는 아플 수 있다. 크면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을 수 없다. 주변에 팔다리 한번 안 부러져본 남자아이가 없고, 부모에게 두고두고 마음 쓰이는 흉터 하나 가지지 않은 여자 아이가 없다. 그런데 전 생애에 걸쳐 온 가족이 돌보아야 하는 중대한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아이라면 어떨까. 나는 기형아 검사 결과를 보고 인공 중절을 고민하던 와중에 자연 유산한 친구를 보며 무서운 상상을 했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낳아도 낳지 않아도 어떤 형태로든 죄책감이 나를 평생 괴롭힐 것 같았다. 어떤 선택이든 생명이 존엄하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고, 병원비와 부모-자식 간 수명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선진국만큼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게 포용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배제하기 힘들다. 심장 질환을 앓던 친구도, 발달장애를 가진 친구도 중학교에서 겨우 50m 떨어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이전에 근무하던 회사는 수 억의 장애인 고용부담금을 낼지언정 장애인은 고용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가 아프면 본인 탓을 한다고 한다. 본인이 무지해서, 잘 돌보지 못해서 내 아이가 아프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내 잘못일지 모른다는 죄의식과 아이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안고 묵묵히 걸어가야 할 길에 나는 선뜻 나설 수 없다. ‘아이보다 딱 하루만 더 살다 죽고 싶다’던 어느 부모의 인터뷰가 수년째 애달프게 기억되는 건 만약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현실은 냉정한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일 거다. 건강한 아이를 낳는다는 보장이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나는 나이 들고 있고, 다량의 불량식품과 전자파에 노출되었으며, 먹고살기 위해 스트레스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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