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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심 Jan 31. 2020

정말이지 다신 산부인과에


“이제 제모할게요”
난소에 생긴 혈종을 제거하기 위해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홑겹의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는데 간호사가 아랫자락을 훌쩍 걷어냈다. 그리고 1000원에 3개들이 수준의 엉성한 면도기를 들고 꼬부랑 털을 밀기 시작했다. 겨드랑이 털도 아니고 다리털도 아닌데 거침이 없었다. 다 되셨어요. 그녀는 작업 부위를 소독솜으로 대충 두어 번 닦아내면서 이번엔 관장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돌아 누웠다.

하필이면 내 자리는 병실 맨 안쪽 창가 자리였다. 덕분에 간호사님께 밝고 선명한 총천연색 엉덩이를 보여드릴 수 있었다. 정오 햇살 사이로 목욕탕에서 본 축 쳐지고 착색된 엉덩이들이 스쳐 지나갔다. 세신 아주머니께서 안쪽 허벅지 때를 밀어줄 때만큼 부끄럽고 민망했다. 그 사이 간호사가 단번에 액체를 주입했다. 내가 아는 관장약은 알약인데? 아니 근데 애초에 제모랑 관장한다고 얘기한 적 없잖아? 팬티 라인에 구멍 두 개 뚫어하는 수술인데 이거 과잉 처치 아니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물론 뱃속이 더 빨리 끓었다.  

간호사가 일러준 5분을 견디지 못하고 3분 만에 화장실을 찾았다. 엘리베이터 바로 옆 과거에 청소도구함으로 쓰였을 그 1평 남짓한 공간에서 나는 치욕을 경험했다. 상투를 잡힌 양반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속옷 벗으시고 치마로 갈아입으세요 - 양쪽에 다리 걸치고 앉아주세요 - 힘 빼세요 차가울 수 있어요 - 오늘내일은 분비물이 나올 수 있어요” 하는 개구리 의자도 수차례 견뎌 냈던 나인데. 찔끔 눈물이 다 났다. 나는 한 번에 1장이면 충분하다는 핸드타월을 신경질적으로 뽑아내어 눈가에 꾹꾹 눌렀다. 정말이지 산부인과에 다신 오고 싶지 않다. 다시는. 거울 속의 나는 비장하고 단호했다.

수술시간이 다 되자 간호사가 휠체어를 끌고 왔다. 두 다리 멀쩡한데 휠체어에 앉아서 이동했다. 검찰 출석하는 재벌 같지 않냐고 남편과 희희 웃었다. 수술 대기실에 누워 1시간 걸린다더라 점심 먹고 와라 하는데 갑자기 건넌방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말소리가 정확하진 않았지만 간호사가 수술에 필요한 물품을 미처 못 챙긴 것 같았다. 의사가 아주 쥐 잡듯이 잡네 잡아. 험악한 가운데 수술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생각보다 빨리 수술실로 이송됐다. 수술대가 너무 차가웠다. 등판으로 스테인리스 금속의 온도가 오롯이 느껴졌다. 손등에 바늘이 연달아 꽂히고 링거대에 약품이 주렁주렁 달리자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이빨이 딱딱 마주쳤다. 나는 수액 속도를 조절하고 있는 분에게 너무 춥다고 말했다. 저기.. 너무 추워요. 그녀는 수술 외 부위를 가릴 요량으로 덮어놓은 초록색 헝겊 조각을 다시 매만지며 곧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안 괜찮다고 이 사람아! 나를 얼려 죽일 작정인가 싶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고자 고개를 들었다. 하늘색 마스크를 쓴 얼굴들이 초음파 사진과 환부를 번갈아 보며 수술 방향을 논의하고 있었다. 치료 목적이지만 그 와중에도 수치심이 올라왔다. 진정한 실험대 위의 개구리가 된 것 같아서.   

잠에서 깼다. 남편이 곁에 있어 안심이 되었다. 내가 깨어난 것을 확인한 간호사는 수술이 잘 끝났고 통증이 심하면 진통제를 더 넣어주겠다고 했다. 소변줄을 연결해서 움직이는 게 불편할 거라고 덧붙였다. 남편이 안 볼 때 했겠지? 제일 먼저 이 생각부터 들었다. 마취된 사이에도 나는 존중받고 싶었다. 나는 지금 환자니까 설령 봤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출산 굴욕은 더 하다던데. 아주 세트로 마련되어 있다던데. 눈 앞이 캄캄해지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다음날 수술 경과를 듣기 위해 진료실을 찾았다. 또 그 자세로 소독하고 초음파를 했다. 선생님, 이 자세가 정말 최선입니까. 원장님이 난소 혈종과 자궁 근종을 제거하고 자궁과 주변 장기가 협착된 부분을 분리하는 생각보다 큰 수술이었다고 했다. 처음엔 물혹이고 자연스럽게 작아질 수 있다고 했으면서 막상 까 보니 말이 달라진 게 영 찜찜했지만 임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에 덜컥 겁이나 한 것치곤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임신이 안될 수도 있다는 말은 나한테 생물학적 결함이 있다는 말 같았다.  

여성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은 무기력했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것 같았다. 식사시간이 돼야만 같은 병실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소고기 미역국, 조개 미역국, 북어 미역국 그다음은 맨 미역국. 착실히 미역국만 나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주는 대로 잘 먹었다. 나는 연속 다섯 끼 만에 더 이상 못 먹겠다고 손을 들었다. 내가 애를 낳은 것도 아니고 산모도 요오드 과다 섭취하면 안 좋다는데 삼시세끼 미역국만 내오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건 편히 식단 짜고 조리하고 단가까지 낮추기 위한 병원 차원의 수작임이 분명하다고 내적 수사를 종결지었다. 대신 병문안 오는 친구들에게 먹을거리를 부탁했다.
“뭐 사갈까? 뭐 먹고 싶어?” “미역 빼고 아무거나”

입원하는 내내 이건 출산의 맛보기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나지 않았다. 미역국 앞에서 무릎 꿇은 내가 진통, 내진, 회음부 절개, 수유, 오로(분만 후 태반이 떨어진 자궁내막이 재생되면서 자궁 및 질에서 배출되는 혈액, 탈락막 등의 분비물) 이렇게 뭐 하나 적응할 새 없이 눈 앞에 들이닥치는 관문들을 잘 통과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저승에서 7개 관문을 통과하면 환생시켜 준다고 했던가. 현생에서 이미 7개 훨씬 넘는 관문을 관통한 엄마들은 환생 정도는 프리패스겠다 싶었다. 아무렴 염라대왕도 눈치가 있지. 암 그렇고 말고. 머리도 못 감고 손목 발목 잔뜩 부어서 어기적 어기적 복도를 걸어 다니는 산모를 바라보며 아직은 내 일이 아니라는데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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