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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심 Jan 31. 2020

쉴 수 있는 방법은 육아휴직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럼 육아휴직 들어가는 게 어때?”
일이 너무 힘들다고 했을 때 사람들 반응이 하나같이 똑같았다. 애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육아휴직을 하라는 건지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싶었다. 어떤 사람은 농담이랍시고 무려 입양을 하라고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든 번뇌와 고통을 단숨에 해결해줄 만능카드로 육아휴직을 제시하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일이 힘들어서 애를 낳을 뻔했다.

창피한 얘기지만 내가 그때 쉴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육아휴직 밖에 없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고민했다. 공공기관에서 180만원 받고 일하면서 유일하게 챙겨 먹을 수 있는 게 육아휴직이었다. 대개 1년 채우고 돌아오는 분위기이긴 했지만 원한다면 최대 2년까지 이 꼴을 안 볼 수 있었다. 나는 자기소개서 쓰고, 면접 보고, ‘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인원 선발로 인해 이번 채용에 귀하를 모실 수 없게 되었다’는 화면을 또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임신, 출산, 육아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 부려먹기 어려운, 그래서 시장에서 잘 안 팔리는 서른둘 기혼 여성 구직자가 생애 처음 되볼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지쳐버렸지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이 일이 좋았고 가끔 재밌기도 해서 육아휴직을 빌미로 살짝 발을 걸쳐 볼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갑작스럽기는 해도 어차피 낳을 거면 서른둘 지금이 적기 아닐까. 일단 애 낳고 키우면서 천천히 이직 준비를 해보자. 쉬면서 좀 괜찮아지면 계속 다녀도 좋고. 이미 두 번이나 때려치운 상태에서 취준 해봐서 알잖아. 그게 얼마나 불안한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라는 것도. 이번엔 제발 똑똑한 척만 하지 말고 똑똑하게 행동하자. 나는 세 번째 회사인 이곳에 세 번째 신입으로 들어와 정착하기까지 이게 아니다 싶으면 기어이 끝을 봐야 하는 성질머리로 미련스럽게 걸어온 과거를 곱씹으며 이번에는 기필코 내 실속을 챙기겠다고 되뇌었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육아휴직은 써먹고 가겠다. 일단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자고 다짐했다.

1월부터 5월까지 버티자는 생각으로 버텼다. 6월은 성과급만 보고 버텼다. 7월은 다음 달로 예정된 진급을 바라보며 버텼다. 8월은 승진하면서 새롭게 배정받은 부서는 좀 다를 거라는 희망으로 버텼다. 9월은 팀 내에서 업무를 아는 사람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준비 없이 처음 맡게 된 이 일만은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끝내보자는 생각으로 버텼다. 10월은 다음 달에 드디어 내 사수가 되어줄 사람이 채용될 테니 오자마자 다 떠넘기고 쉬엄쉬엄 인수인계나 하라는 팀장의 거짓말에 속아 버텼다.

그러다 11월, 정신없이 행감을 마쳤더니 팀장이 지금 하는 일에 또 다른 일거리를 얹어 주었다. 나는 업무분장이 잘못된 거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는 다른 사람들은 그럼 노냐고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정말 그래 보였다. 문득 이만큼 했으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일을 잘하긴 한 건가. 다른 사람들은 사업을 말아먹든 말든 천하태평인데 왜 나만 챙길 건 산더미고 애가 닳는지. 화냈다가 울었다가 팀원들 눈치나 보게 하는 미친년이 된 건가.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지 않고 세금으로 하는 일 조금이나마 잘하고 싶었을 뿐인데. 팀장이 나를 퇴사시키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아무렇게나 굴리는 것 같다는 동료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빵구만은 내지 않겠다고 기를 쓰고 해냈던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졌다. 그래, 결국 다 내 탓이지 뭐. 그렇게 나는 세 번째 퇴사를 했다.

이직처가 정해지지 않은 채 퇴사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린다. 퇴사하면 뭐하게?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야. 나중에 후회한다 너. 우리 집사람도 애 낳고 일 그만둔 거 아직도 후회해. 나가서 이만한 직장 구하기 쉬운 줄 알아? 요즘 애들은 인내심이 부족해. 우리 딸은 나 닮아서 강단이 있는데 말이야.(실제로 들은 말이다) 라떼는 말이야. 힘들어도 그만둔다는 생각도 못했어. 아직 애기 없지? 그래. 쉬면서 더 늦기 전에 애 낳고 해야지. 애국해야지. 애국.(대한민국 만세다 시불 놈아!) 퇴사 당일, 요새 살쪘던데 임신해서 퇴사하는 거냐는 말은 하도 들어서 우스울 지경이었다. 잠을 못 자서 부은 건데, 사람들은 자기가 일정 지분씩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못하는 듯했다.

애초에 이렇게 하루하루 회사 가기 싫다,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흔들리면서 무턱대고 아기를 가질 생각은 없었다. 육아휴직은 그냥 핑계였다. 멈추지 않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정말로 있기는 한 건지 궁금해서 나를 여기에 단단히 붙잡아두기 위한 핑계. 버티는 게 이기는 거라면 나는 항상 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내가 동그라미 칠 수 있는 정답을 찾기 위해 매번 지면서도 일어선다.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똑같은 사람이 돼야 하는데 나한테는 죽기보다 싫은 오답이다. 여기 아니면 안 되는 삶은 한참 나중에나 살고 싶다. 아기를 낳으면 내가 이 회사를 박차고 나온 일을 후회하게 될까. 이다음 나는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사기업에서 육아휴직을 쓰고 돌아오지 못한 여자 차장님이 떠올랐다. 잘 지내고 계신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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