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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Nov 09. 2021

혼자 먹는 호빵의 맛

잘 벌어서 잘 먹어야 하는데

새로운 계절이 찾아오면 반가운 이유 중 하나는 그 계절에 걸맞은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음식이 그 계절과 잘 어울리는가. 내가 그걸 결정하는 기준 중 하나는 그 계절을 닮은 음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여름에는 블루레모네이드나 블루사파이어를 마셔야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깊고 차가운 여름바다를 꼭 닮았기 때문이다. 코 아래 스치는 공기가 시큰해지면 헤이즐넛 라떼를 찾는다. 부드러운 밀크폼은 찬바람을 막아보려 팔에 끼워넣기 시작한 도톰한 가디건을 떠오르게 하고 그 아래에는 가을 냄새나는 견과류 향이 숨겨져 있다. 이 짧은 가을이 지나고 때이른 겨울이 찾아오고 있는 것 같다. 겨울을 가장 많이 닮은 음식을 하나 골라보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호빵을 택할 것이다.










나는 호빵을 좋아한다. 정말 말도 안 되게 엄청나게 좋아한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고 그냥 태어날 때부터 좋아했던  같다. 호빵  개가 너무 크다고 느껴지던 어린 시절에는 아빠가 호빵 하나를 반으로 나눠서 먹으라고 줬던 기억도 난다. 동그랗게 생긴 빵이라면 덮어놓고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특별히 호빵이 좋은 이유는 호빵이 내게는 일종의 신호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위를 끔찍하게 타는 탓에 힘겨운 여름을 보낸 뒤에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져 가는 아침 공기를 매일같이 반가워하면서 겨울을 기다린다. 그러다가 현관문을 나선 어느 날은 직감적으로 바로 무언가를 알아챌 수가 있다. 오늘부터 ‘겨울 시작되는구나. 숨을 쉬는데  끝이  누가 꼬집은 것처럼 살짝 아려올 . 나는 그때를 겨울이 오는 때로 정했다. 반가운 계절이 다시 돌고 돌아 노크를  온다. 그날부터 길에서는 군고구마를 팔고 편의점에서는 온갖 맛이 나는 호빵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이제 진짜 겨울이 찾아왔다.





호빵을 먹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는데 다른 건 잘 모르겠고 내 기억 속에 호빵은 늘 자기 전에 밥솥에 넣었다가 먹는 빵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먹기 딱 좋게 따뜻하고 부드럽게 익어 있었다. 하얀 밥 위에 하얗고 말랑말랑한 빵이 김을 모락모락 내면서 올라가 있는 게 예쁘기도 했다. 속을 단팥으로 채웠다는 것을 제외하면 “알프스의 소녀”에서 하이디가 페터네 할머니를 주려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잔뜩 싸들고 온 희고 말랑말랑한 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짧은 찰나에 이런저런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호빵을 꺼내서 먹고 등교를 했다. 포슬포슬한 호빵 속은 바로 먹기에는 너무 뜨거운데 시간은 없고 급히 입으로 불어 먹고 나서 도톰한 겨울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입가까지 둘둘 두르고 나면 아무리 추운 겨울바람도 무섭지가 않았다. 입 안이랑 속까지 따뜻한 기운이 잔뜩 들어간 채로 옷을 잔뜩 껴입어 뒤뚱거리며 학교에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교 다니던 시절은 애진작 끝이 났고 회사 다니는 시절이 시작되었지만 학교와 회사 사이 그 어딘가 애매한 시기였던 작년에는 돈이 없어서 호빵을 못 먹었다. 겨울이 온 게 분명했는데 속을 덥힐 따뜻하고 달콤한 빵이 없으니까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겨울이 아직 시작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허름한 편의점 창문에 붙은 “호 빵 개 시”라는 촌스러운 글자들을 보고 잠시 통장 잔고를 떠올려본 뒤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몇 번 쥐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찜기 안에서 돌돌 돌아가고 있는 호빵을 못 본 척 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면 대부분의 날들은 별생각 없이 잊어버렸지만 겨울의 단 맛이 너무 그리운데 이런 하잘 것 없는 이유로 참아야 한다는 게 괜히 서러워지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충분히 잘하고 있지 못한 건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물론 고민해봤자 잘못한 게 없으니 결론이 나지 않았고 시간은 내 고민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그냥 제 갈길을 갔다. 내가 어떤 방향으로 삽질을 하는지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시간은 혼자서 열심히 흘러갔고 해가 바뀌어 나는 다시 호빵을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어릴  했던 것처럼 밥솥에 호빵을 넣어 두고 다음  아침에 먹으려 다. 이제 돈을 버니까 호빵을 한 개씩 사 모을 필요가 없어, 그냥 통 크게 여러 개 들어있는 것을 사면 돼. 한 번에 두 개 세 개씩 먹어도 아무 문제없을 거야. 그렇게 잔뜩 들떠서 집에 와서 포장을 뜯었다. 그런데 다시 잘 생각해보니 밥솥은 거의 매일 비어 있고 코드가 뽑혀 있네, 누군가 밥을 먹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밥솥이 늘 따뜻한 상태로 유지될 거 아니겠어. 이제 같이 사는 가족도 없고 이 집에서 밥을 먹는 사람은 나 하나뿐인데 나는 매일 쌀밥을 지어먹지 않으니 밥솥이 덥혀져 있을 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밥을 한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난다. 그리고 밥솥은 전력 효율이 안 좋아서  푸고 나면 바로 꺼버린다. 밥솥을 보온 상태로 내버려 뒀다가는 전기세 폭탄을 맞을지도 모르는걸. 이런저런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더는 따뜻한 솥이 품은 열기에 기대어 호빵을 쪄 먹을 방법이 없으니까 다른 방법을 택해야 했다. 그래서 호빵을 먹기 위해 밥솥 대신 전자레인지를 열었다. 수분이 날아가지 않게 랩을 덮어서 조리하시오. 원래는 이런 구차한 방법을 쓰지 않고도 촉촉하게 먹을 수 있는 빵이었는데. 그리고 밥솥을 사용하지 않으면, 이건 더 이상 내가 아는  맛이  나잖아. 이건 그때  겨울맛이 아니잖아.





처음 전자레인지로 호빵을 데울 때 같이 먹을 친구 것까지 두 개를 돌렸다. 포장지 겉면에 쓰인 방법대로 빵 윗면을 랩으로 씌워서 40초간 조리를 해서 그릇에 담았다. 어쩐지 조금 딱딱했던 것 같았던 호빵을 한 입 베어 문 친구는 볼멘소리를 했다. “하나도 안 익었잖아! 속이 너무 차가워!” 입 모양대로 하나씩 푹 패인 딱딱한 하얀 동그라미 두 짝을 다시 전자레인지에 밀어 넣으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이 겨울을 너무 대충 보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잠시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전자레인지로 언제든 대충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레토르트 식품처럼 나에게 찾아온 귀중한 계절을 온전히 맞이하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한편 이제 잘밤에 호빵을 넣어  뜨끈한 밥솥이 없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 한쪽에 늘 있었던 어떤 아주 오래된 믿는 구석 하나가 사라진  같은 느낌도 든다. 이제 찬바람이 불면 목도리를 스스로 둘둘 메야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따뜻함과 달콤함 알아서 들고 차곡차곡 쌓아 가야 하는데. 그게 너무 당연한 나이인데도 가끔은 그냥 만들어져 있는 익숙한 포근 속에 어린애처럼 기대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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