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 연길 Jun 05. 2024

육아휴직 2주 차 : 육휴의 로망

240205-240211



 휴직 전부터 그려왔던 로망이 있다. 그렇다. 나는 그런 쓰잘데기 없는 것부터 상상하는 성격이다. 회사일이 바쁠 때가 오히려 그런 망상으로 도피하는 적기였다. 일단 날씨는 전체적으로 맑지만 구름이 성성히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아기를 다정하게 안아서 낮잠을 재우고 있다. 순두부 나르듯 살포시 눕혀놓고 거실로 나온다. 틀어놨던 라디오에선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클래식 FM(93.1 MHz)에 맞춰 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를 조용히 내리고 깨끗한 식탁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본다. 삼십여 년간의 번뇌가 리셋되는 기분이다.


 로망을 실현할 날이 왔다. 그날은 아침부터 작정을 했다. 아이의 체력을 열심히 소진시킬 심산이었다. 마침 백화점 문화센터에도 가는 날이었다. 운전대를 잡고도 홈쇼핑 채널의 쇼호스트들을 떠올리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어린 왕자 코스튬을 하고 있는 아이 옆에서 한 마리의 여우가 되어 깡총거렸다. 바지를 거꾸로 입혀 나왔다는 사실을 인지한 건 힘겹게 유아휴게실을 찾아간 이후였다. 아기는 줄곧 “엄마!”를 외쳤다. “나 아빤데?” 서운함이 약간 묻은 말투로 답해주었다. 결국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몰라주는 내 품에 안겨 한참을 울다가 잠들었다.


 닌자처럼 방에서 빠져나왔다. 거실엔 꺼놓지 못한 장난감에서 동요가 스산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 머리는 땀에 헝클어져 봉두난발이었다. 평소에 먹지도 않는 달다구리가 당겼다. 화장실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어디선가 받았던 캔커피를 숨죽여 땄다. 잠복 형사처럼 몰래 문을 열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바닥에 멍하니 앉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텅 빈 거실이 먹먹했다. 아차 싶었다. 이 고요함은 아내를 일 년간 얼마나 외롭게 했을까. 혼자서 문센 데려가는 건 정말 힘드네. 고군분투했겠구나. 미안함에 가까운 감정이 뒤늦게 몰려왔다.




 우린 자주 미안해야 할 대목에서 미안해하지 않는다. 미안해하지 않는 것이 더욱 그에게 미안한 일인 것도 모르고 있다. 미안함에는 가끔 눈물이 매달리기도 하고 후회와 고마움이 매달리기도 한다. (이빈섬, 「미안과 불안을 뒤집어보니」, 『The Views』, 2023. 4. 23)




 미안한 감정은 꽤 강렬하다. 정말 피하고 싶은 기분이기도 하다. 타인과 나의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죄책감이나 연민만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나는 작년의 우리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내가 집에 돌아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감정을 털어놓곤 했다. 나는 들으면서 그녀가 말하는 문장들의 맺음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으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되겠네”. 나름 솔루션을 주려고 했나 보다. 병신, 헛 똑똑이. 그냥 잘 들어줄걸. 아내는 내가 참 야속했겠다.




 내가 다른 사람의 모카신을 신고 1마일이라도 걸어보기 전에는 그를 판단하지 말게 해 주소서 (아메리칸 원주민 시우족 기도문 中)




 사실은 나조차도 휴직을 휴식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면 절대 몰랐을 어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측했던 감정의 이면에 있는 심정을 알아채고 말았다. 자유로움은 외로움을 수반한다. 주체성을 갖게 되면 부담감도 떠안아야 한다. 아이에게는 수시로 미안한 일 투성이다. 더군다나 나는 업보까지 있으니 아내에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견뎌낼 수밖에 없다. 갑자기 남은 일 년이 막막해졌다. 아니 당장 다음 주부터 걱정이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명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240205(월) : 아빠와 서대문도서관에 다녀옴. 래인카페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눈을 맞았다.

240206(화) : 아빠와 신촌 현대백화점에 가서 문화센터 수업을 듣고 장을 봤다.

240204(수) : 예방 접종을 하고 오름카페와 말랑김밥에 들러 아빠 간식거리를 샀다. 당근마켓 판매도 했다.

240205(목) : 서대문자연사 박물관에 갔다. 도서관매트에서 걸음마 연습을 했다. 금옥당에서 어른들 명절선물을 같이 사러 갔다.

240206(금) : 설이라서 전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탔다. 아빠의 외숙모와 사촌형도 만났다.

240207(토) : 설빔을 선물 받고 남양주로 갔다. 외가 식구들이 반겨주었다.

240208(일) : 아침에 외가댁 근처를 산책하고 가족들과 맛있는 명절음식을 먹었다.



화요일마다 문화센터에 갔다. 자세히 보면 바지를 거꾸로 입고 있다.


이전 03화 육아휴직 1주 차 : 신입 사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