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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연길 Jun 12. 2024

육아휴직 3주 차 : 타령 아저씨

240212-240218


 명절을 보내고 나니 수도꼭지처럼 꽉 조여놓았던 마음이 느슨해졌다. 고향을 떠나온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하다. 아직도 타향살이 속에 긴장감이 있는 걸까. 믿을만한 가족이 아이를 돌봐주니 더더욱 가슴이 놓였다. 본가에서, 처가에서 지낸 삼 일간의 시간이 달콤했다. 자 이제 다시 시작이다, 라는 구호와 동시에 위기가 찾아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보일러가 고장 나있었기 때문이다. 낭만에 젖었던 휴양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혹하다. 바위처럼 단단한 다짐을 한 지 백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았었다. 보일러는 만우절의 외국인처럼 설악산 흔들바위를 밀어 떨어뜨렸다. 역시나 나의 유리멘탈도 고장 났다. 당장 기저귀를 어떻게 갈아야 할지 난감했다. (죄송합니다 또 똥얘기네요) 며칠간 찐하게 안아주던 엄마가 출근하자 아이는 보채기 시작했다. 휴대폰으로 보일러 고장을 검색하기도 힘들었다. 황량한 집 거실이 설악산 대청봉 꼭대기처럼 추웠다. 둘 다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문제는 어찌어찌 해결했다. 나는 지금 따뜻해진 거실에 앉아있다. 다만 모든 기력을 소진했다. 손가락만 겨우 움직일 수 있기에 핸드폰으로 오늘을 기록한다. 몇 달 전 아내가 나의 감정기복에 대해 우려를 표한 적이 있다. 귓등으로 들었던 그 말이 떠오른다. 나는 이번 경험을 통해 육아관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온 힘을 다해 놀아주는 것, 적절한 교육을 시켜주는 것보다 몇 곱절 중요한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 아이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내 감정 조절에 실패했다. 빨리 유아식을 먹어야 데운 물을 찬물과 섞어서 씻길 수 있고, 아기가 안긴 채로 내 핸드폰을 쳐내며 떼쓰지 않아야 보일러 기사님께 전화를 할 수 있었는데 무엇하나 순탄치 않았다. 나는 감정을 드러냈다. 사실 아이는 평소처럼 자기표현을 했을 뿐이었다. 달랐던 건 내 마음가짐 하나였다. 그렇게 아이에게 나쁜 기억을 안겼다. 속이 쓰렸다.




 일을 하다 보면 어떤 날은 개인적인 연유로 피로한 때도 있고, 기분이 좋지 않은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일대일 접객이 우리를 대표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좋은 기분은 자신의 기분을 맞바꾸거나 갉아먹으면서 건네는 것이 아닙니다. (중략)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지 않은 채 접객을 하면 자신의 하루도 굉장히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박정수,『좋은 기분』, 2024)




 그렇다. 육아는 수련이었다. 육아의 아(兒)는 아(我)라는 누군가의 말에 이제야 공감한다. 아, 나는 연중무휴 접객을 해야 하는 일을 맡았구나. 더군다나 상대는 당분간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에겐 무엇이 필요할까. 평정심, 내가 가장 자신 없는 분야에 당도했다. 아내의 우려가 인정되는 순간이었다. 명상과 다도를 검색해 보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없었다. 급한 대로 괜찮은 방법을 본능적으로 찾았다. 어릴 적 봤던 어른들을 카피했다. 울화가 치밀 때마다 말에 멜로디를 붙여서 내뱉으면 된다. 한동안 집에서 타령이 울려퍼졌다. “애~기~가 오늘은~ 왜 그러나~”




240212(월) : 명절 후 가족휴일. 꽃그리는 아이, 보틀라운지 채우장, 감놀카페에 방문했다.

240213(화) : 아빠와 문화센터에 가는 날이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해녀복장을 했다.

240214(수) : 유아차를 타고 홍제천을 산책했다. 롱앤쇼트에 들렀다가 신연중학교 운동장에서 놀았다.

240215(목) : 집의 보일러가 고장 났다. 기사님이 오셨다. 아빠에게 혼나서 억울했다.

240216(금) : 아빠와 육아종합지원센터에 가서 놀았다. 다정한 김밥에서 엄마아빠 저녁거리를 사 왔다.

240217(토) : 엄마아빠와 삼청동에 갔다. 베테카텐 식사, 지우헌갤러리에서 조경규 작가님 작품 감상을 했다.

240218(일) : 아침에 홍제천 산책을 했다. 점심에는 둘리네가 집으로 놀러 왔다.



2/15(목) 오전 9:25 아내에게 보낸 메시지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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